이 글을 쓴(1986년) 토니 클리프는 2000년에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립자다. 토니 클리프는 이제 고전이 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 《대중파업》의 진정한 가치와 함께, 이 가치를 인정하는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그 약점도 지적한다.


원제가 《대중파업,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고전적 저작만큼 대중파업에 관해 빼어나게 해설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 얇은 책에서 로자는 노동계급을 전투부대로 만들고, 그들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그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사회를 변혁하도록 하는 데서 대중파업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다루고 있다.

1906년 8월에 쓴 이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1896~1905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고양됐던 파업 투쟁의 물결을 개괄적으로 묘사한다. 1896년 5월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총파업을 벌였고, 이듬해인 1897년에도 총파업이 있었다. 그 뒤 1902년 3월에 캅카스 지역의 석유 노동자들이 대중파업을 할 때까지 무수한 소규모 파업이 잇따라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에는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총파업을 불렀다. 1903년 5~7월에는 남부 러시아 전역이 불타올랐다. 바쿠, 티플리스, 바툼, 엘리자베스그라드, 오데사, 키예프, 니콜라예프와 예카체리노슬라프가 총파업 물결에 휩쓸렸다. 1904년에 러일 전쟁이 터져 파업 운동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제정 육군과 해군이 일본 군대에 졌으므로 파업 운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하여 1904년 12월에는 바쿠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 소식이 제정 러시아 구석구석에 퍼지기 전인 1905년 1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분석하며 《대중파업》을 썼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하는 노동자들

“페테르부르크 사태에 크게 자극받아 프롤레타리아가 1월에 갑작스럽게 일으킨 총반란은 명백히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 전쟁을 선포하는 정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면적인 직접 행동은 훨씬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전기충격 같이 수많은 대중이 갖고 있는 계급 감정과 계급 의식을 처음으로 일깨워 줬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 감정을 자각하면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몇 십 년 동안 끈기 있게 견뎌 왔던 사회적·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됐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슬을 흔들고 잡아당기려는 자발적·일반적 움직임이 시작됐다. 근대 프롤레타리아가 겪는 수많은 고통을 보며 그들은 지난날의 피어린 상처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한 쪽에선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다른 쪽에선 하청 노동에 맞서 싸웠다. 이쪽에선 야만적인 감독을 부대에 담아 손수레에 실어 쫓아냈고, 저쪽에선 악명 높은 벌금제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임금 인상 투쟁이 어디에서나 벌어졌고, 곳곳에서 가내노동 폐지 투쟁이 벌어졌다.”

경제적 대중파업은 제정의 경찰·군대와 충돌하게 됐고, 정치 파업으로 곧장 전환됐다. 정치 파업은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는 잠자고 있었던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웠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조건을 개선하고자 경제 파업을 벌였고, 이번에는 경제 파업이 정치 파업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대중파업은 개혁주의(와 그 반대편에 있는 신디컬리즘)에 고유한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극복한다. 대중파업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는 개혁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투쟁과 결합시킨다. 대중파업은 현재를 미래 사회주의와 연결시키는 다리인 것이다.

대중파업 속에서 노동자들은 역사의 방관자 또는 연극 속의 병사이기를 그만두고,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고 스스로 변모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한편으로 혁명적 대중의 정치적 훈련과 그들에 대한 지도를 부르주아 정당이 떠맡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단순히 낡은 정부의 타도 문제에만 한정됐던 기존의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단기간의 바리케이드 전투가 혁명 투쟁에 알맞은 형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동계급의 의식이 혁명 투쟁 과정에서 깨어나고 있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세력을 정비하고 스스로를 지도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착취뿐 아니라 기존 국가 권력에도 대항해서 혁명이 진행된다. 그와 함께, 대중파업은 기존 국가 권력을 무너뜨리고 타도하며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광범한 계층들을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자연스러운 수단이 됐다. …

“그러나 직접적인 대중 정치투쟁을 벌이려면 프롤레타리아가 먼저 하나의 대중으로 결집돼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공장과 작업장, 광산과 주물 공장의 한계를 벗어나야 하며 자본주의의 일상적 멍에가 그들에게 강요한 분열과 퇴보를 극복해야 한다.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위대한 혁명 투쟁의 초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우며 충격적인 투쟁 형태이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발전하면 할수록 대중파업은 더욱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된다. 앞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주된 투쟁 형태였던 바리케이드 전투와 무장한 국가 권력에 맞서 일으키는 공공연한 충돌은 오늘날 혁명에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대중 투쟁의 전 과정에서 절정이나 한 계기일 뿐이다.”

경제적 개혁을 위한 부분적 투쟁과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다고 보는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시기에는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성장·전화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 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돼 명확해지고 강화되면서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고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키며,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지는 동안에 이 두 가지 투쟁,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대중파업의 논리적이고도 필연적인 절정은 “공공연한 봉기인데, 이것은 일련의 불완전한 봉기들 ― 터전을 닦으며, 그래서 당분간은 부분적 ‘패배’처럼 보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기도 쉽고 또한 각각의 봉기가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 의 정점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성장

로자 룩셈부르크는 “급변하는 혁명 물결의 썰물과 밀물 속에서 가장 지속적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성장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지적 수준이 크게 높아지는 것은 이후에 불가피한 경제·정치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더한층 발전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고 썼다.

또한 노동자들은 얼마나 높은 이상으로 도약하는가! 그들은 투쟁하는 동안에는 그들과 그들 가족을 부양할 생계수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린다. 그들은 사전에 모든 기술적 준비들이 돼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대중파업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대중의 이상주의를 한꺼번에 작동시켜, 그때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온갖 어려움을 대중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면서 심각한 고통들을 해결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효과가 있음을 강조해 설명한다. 그리고 로자는 대중파업이 부문주의와 지역주의 같은 다른 장애물을 허물어 버리는 경향도 있음을 명확히 했다. 또, 로자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고용주들과 그 국가의 이해관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은 심각한 약점도 있다. 《대중파업》은 보수적 노동조합 관료가 대중 투쟁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과소평가한다. 로자는 대중 봉기가 일어나면 운동 자체가 심각한 해를 입지 않고서도 보수적 지도부가 제거될 것으로 봤다. 로자는 19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독일에서 어느 때 어떤 이유에서든 대중 행동이 대규모 정치투쟁이나 대중파업으로 벌어진다면, 그때는 강력한 노동조합 투쟁 시대가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고 사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 운동에 동의하는지 아닌지에 아랑곳없이 진행될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운동에 비켜서 있든 아니면 운동에 저항하려고 하든, 그들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비슷한 경우의 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상황의 소용돌이 속으로 간단히 휩쓸려 버릴 것이고, 대중의 경제·정치투쟁들은 그들 없이도 진행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거듭거듭 얘기했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역사가 매우 짧고 관료가 비교적 허약했던 러시아에서조차 10월 혁명이 승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노조에 대한 관료의 영향력과 노조 내부의 우파와 멘셰비키의 영향력이 분쇄됐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에는 노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01년에 주바토프라는 경찰 간부가 일종의 노조를 조직한 게 고작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그 노조를 가리켜 금속노동자상호공제회라고 불렀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단체들이 결성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이 단체들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해산됐다. 참된 의미의 노조는 1903년에 결성된 인쇄공 노조였다.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직전에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의 소비에트, 주요 산업의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인쇄공 노조와 철도노동자협회 그리고 우편·전신조합은 장악하지 못했다. 혁명이 승리한 뒤에야 겨우 14년의 역사를 가진 인쇄공 노조의 관료를 비로소 분쇄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인쇄노조(SOGAT)가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면서 2백3년 동안 존재해 왔고, 전국식자공협회(NGA)는 2백50년 동안이나 존재해 왔다! 제정 러시아에서 노조관료는 시베리아에서 [유형으로] 최후를 맞이하곤 했지만, 영국에서는 상원의원이 된다.

사회민주당뿐 아니라 노조에서 관료가 갖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했기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정당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은 1905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적 대중파업들, 1920년 이탈리아의 공장점거, 1936년 프랑스의 공장점거, 1956년 헝가리 총파업 그리고 1980~81년의 폴란드 연대노조를 이해하는 열쇠다. 1909년 스웨덴, 1913년 벨기에, 1926년 영국의 관료적 대중파업들과 1984~85년 영국의 광원 파업 그리고 1985년 덴마크 총파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관료의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성격을 알아야 한다.

물론 관료적 대중파업과 자발적인 대중파업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노동자들은 극심하게 통제받는 파업에서조차 관료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사용자들이나 관료들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혁명적 노동자 당은 관료적 파업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닌 불멸의 힘은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체임을 확고히 믿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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