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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에 빠진 미국 제국주의

지난 1월 28일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국정연설에서 향후 국정 운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런데 오바마는 주로 경제 정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외교 정책에 관한 구상도 밝혔지만, 주로 중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반면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한 언급은 한두 차례에 그쳤으며, 지난해 연설과 달리 북한은 오바마의 연설에서 단 한 차례도 거론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경제 회복을 위해 “내치에 치중하면서 ‘외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이며, 외교에서는 그동안 강조해 온 아시아·태평양보다 “중동 지역의 현안”을 우선하기로 한 것 같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칼럼니스트이자 미국 대외정책 전문가인 존 페퍼도 이 연설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귀환]” 전략은 “중국에 경고하고 일본·한국·대만·기타 국가들을 안심시키고자 설계된 광고 캠페인 이상이 아니었다.”

이런 주장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오바마 정부 들어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주요 열강의 경쟁과 긴장이 커지는 것을 봤다. 댜오위다오(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격화, 2009~10년 남·북한의 서해 분쟁 등은 동아시아에서 열강이 공공연히 적대하고 반목하기 시작했음을 실감케 한 사건들이었다.

그럼에도 국정연설에서 드러났듯이,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중동 문제

오바마의 “아시아 귀환” 전략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추세에 대한 미국 오바마 정부의 대응책이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 실패와 2008년 경제 위기는 미국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줬다. 이 때문에 미국 지배자들 내에서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미국이 수렁에 빠져 있는 동안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특히 중국)의 부상을 제대로 견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오바마는 자국 패권을 유지할 수단을 강구해야 했고, 그것이 “아시아 귀환” 전략이었다. 즉, 처음부터 “아시아 귀환” 전략은 미국 정부가 상당한 딜레마와 어려움을 떠안고 시작한 것이었다.

경제 위기, 중동 문제 등 온갖 난제 속에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할 처지다. 지난해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와 시진핑

그 딜레마의 한 축이 바로 중동 문제다. “테러와의 전쟁” 실패는 중동에서 미국이 누려 온 지위에 커다란 타격을 줬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점령 실패가 낳은 부정적 유산 때문에 미국 지배자들은 중동에서의 새로운 군사 개입을 주저하게 됐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명예롭게’ 마무리지어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리고 그동안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지에 엄청나게 집중된 군사력의 일부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돌려 왔다.

그러나 아시아로 눈길을 돌린다고 해서, 중동에서의 패권을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한테 중동은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가치가 있다. “세계의 석유 수도꼭지”라는 중동을 손에 쥐고 있어야, 유럽과 동아시아의 잠재적 경쟁국들한테 상당한 영향력을 계속 미칠 수 있다. 특히 중동산 석유에 대한 중국·일본·한국의 수입 의존도가 점차 커져 왔기 때문에, 이 점은 앞으로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랍 혁명과 그 여파는 오바마한테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였으며, 큰 근심거리였다. 아랍 세계 곳곳에서 친서방 독재정권이 잇달아 무너지거나 흔들리자, 지난해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 기디언 래치먼은 “이러다 [중동에서 미국의] 비공식 제국이 사라질 지경이다” 하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오바마의 대외정책에 의문이 제기될 만했다. 미국 지배자들 일부는 미국이 전략적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긴다고 하는 게 ‘정작 중동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의 경쟁국이 영향력을 높일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제기해 왔다. 이집트 혁명, 시리아 내전, 팔레스타인 문제, 이란 핵개발 등 이 지역의 산적한 난제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서방 선진국과 중동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지난해 미국이 시리아 군사 개입에 실패한 일은 미국 지배자들의 고민을 더 깊게 했다. 영국 의회에서 군사 개입 부결, 군사 개입이 자칫 혁명에 미칠 영향 등의 이유로 미국은 막판에 군사 개입을 주저했다. 결국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포기하고 러시아의 중재를 받아들이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은 경제 회복을 위해 상당한 역량을 투여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군비마저 축소하고 있는 지경이다.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논란 때문에 지난해 10월 오바마가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 정상회의에 불참한 것은 참으로 시사적인 일이었다. 이 덕분에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정상회의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낼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 문제가 대외정책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고, 아시아 국가들한테 미국의 “아시아 귀환”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법했다.

우선순위

미국의 대외정책이 처한 딜레마 때문에 미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놓고 앞으로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부상을 저지해야 한다는 데는 미국 지배자들 사이에 분명한 합의가 있으며,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포위하고 직접 견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가 미국 지배자들 일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과의 핵 협상을 진행한 것도 중동의 불안정을 어떻게든 더 커지지 않게 붙들어 매고 아시아에서 중국을 더 견제하려는 의도가 컸을 것이다. 즉, 오바마의 “아시아 귀환” 전략을 단지 “광고 캠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

점차 불안정해지는 동아시아 미국의 “아시아 귀환” 전략은 단지 “광고 캠페인”이 아니다.

유라시아의 양쪽 끝인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는 건 냉전 때부터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세계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유럽, 북미, 동아시아)에서 지배력을 행사해야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부상이 동아시아에 가져온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다. 중국의 급속한 군비 증강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한테 커다란 도전이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인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리는 것은 미국이 국내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미국 지배자들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지키려는 자국의 노력이 약화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잘 알고 있다. “미국이 중국에 비해서 장기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은 국가 전략을 재고하려고 할 것이다. 어떤 동맹국은 자주국방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고, 아마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것이다. 다른 동맹국은 사기가 꺾이면서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더욱 다가갈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 미국이 [세계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애런 프리드버그, 《패권 경쟁》, 까치)

이 때문에 미국은 패배의 상처를 안고 경제 위기로 군비도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동의 불안정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상처 입은 야수가 더 위험한 법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지난해 시리아 군사개입 계획이 좌절된 지 얼마 안 돼, 미국은 곧장 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에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방위예산 증액, 방위계획 대강의 개정 등”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일본의 군사대국화 추진에 날개를 달아 줬다.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중국의 반발을 부르며 11월 중국이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상처 입은 야수

이처럼 그동안 미국의 “아시아 귀환”은 동아시아 불안정을 크게 키웠다. 오바마 정부는 2010년 전후로 본격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지정학적·군사적 영향력을 제고하려고 노력해 왔다. 여기서 핵심은 일본의 전략적 종속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큰 틀에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들의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분열돼 있고 경쟁적인 지정학적 구조는 오바마가 이런 전략을 펼치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이런 노력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 간의 긴장과 경쟁을 키웠다. 그리고 미국·일본과 중국이 동중국해에서 국지적 충돌을 벌일지 모른다는 우려도 점차 커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정학적 긴장은 일시적 이완은 있겠지만 점차 악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올해도 동아시아에서 긴장을 불거지게 할 쟁점들이 많다. 예컨대 올해 상반기에 아베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 해석 변경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크며,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도 올해 말에 개정할 것이다. 최근 일본 자민당 내에서는 군사 동맹 여부와 무관하게 대만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중국을 겨냥하고 있으므로, 그때마다 중국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다.

한반도도 언제든 지난해 초와 같은 긴장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오바마는 대중국 포위의 명분을 위해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악의적 무시)”를 고수해 왔다. 오바마 집권 후 지금까지 6자회담이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을 만큼,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압박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2월 13일 한국에 온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가 방한 내내 대북 공조와 이를 위한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즉, 미국이 최근에 뒤숭숭해진 한일 관계를 봉합하고 한미일 삼각 동맹을 강화할 카드로 언제든 “북한 위협론”을 끄집어 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앞으로 미국 제국주의는 중동 문제, 경제 회복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계 서열에서 맨 꼭대기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이지만, 최근 들어 온갖 문제점을 드러내며 힘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아랍 혁명이 보여 줬듯이, 미국 제국주의가 전략적으로 집중해 온 동아시아 같은 곳에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반란이 강력하게 터진다면, 그게 미국 제국주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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