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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시장 개혁·개방과 이를 둘러싼 지정학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한은 지난해에만 13곳의 경제개발구를 지정하고 투자설명회를 여는 등 해외 자본을 유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한 국내의 자원과 자본만으로는 어려워진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이런 시도가 1980년대 초 중국의 경제 개방에 견줄 만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 개혁·개방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진전될 수 있을지, 그리고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전망이 밝지 않다. 북한의 시장 개혁·개방은 대외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지금의 대외 환경이 북한에 상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은 주로 중국과의 대외 무역에 기대어 필요한 자금을 얻으려 한다. 개성공단을 통한 남북 교역을 제외하면, 북한의 전체 무역에서 대중국 무역은 무려 90퍼센트에 이를 정도다.

이런 현실 때문에, 북한이 추진하는 경제개발구들은 대부분 중국 자본의 유치를 겨냥하고 있다. “13개 경제개발구와 새로운 경제특구들이 대부분 북쪽과 중국의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에 몰려 있다. 반면 남쪽을 염두에 뒀다고 판단할 수 있는 곳은 개성공단 옆에 위치한 개성첨단기술개발구가 거의 유일하다.”(〈한겨레〉, 2014년 2월 19일)

이것은 북한 정권이 의식적으로 추구한 바는 아니다. 사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미국, 일본 등 서방과 관계를 개선해, 국제 금융기구들로부터 경제 회복에 필요한 차관을 들여오기를 열망했다.

심지어 “북한은 미국이 자신과 좀더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왔다.”(미국 국제정책센터 아시아프로그램 국장 셀리그 해리슨)

그러나 미국의 대북 강경책 때문에 북한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거듭 좌절했다.

미국 지배자들에게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북한 ‘위협’을 과장해 그것을 빌미로 중국을 겨냥한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배치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북한 위협의 관리자로서 동아시아의 강대국들을 미국 패권 질서에 묶어 놓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도 여전히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때까지 “전략적 인내”를 하겠다는 태도다.

최근 오바마 정부는 한일 관계의 악화로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전략을 추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가 남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촉구할 때도 북한 ‘위협’론은 꽤 유용한 카드다.

미국 지배자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2000년대 들어 북한의 주요 교역 파트너는 중국과 남한이었다.

엇갈리는 이해관계

중국은 주로 지정학적 이유로 북한과의 경제 관계를 강화해 왔다. 특히, 중국은 북한 붕괴가 낳을 혼란과 난민 등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군사적 완충지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중국은 북한을 지탱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 또한 중국이 투자한 라선(나진·선봉)경제무역지대는 중국이 동해안(그리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한테 상당한 지정학적 이점을 준다.

남한 지배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남한 지배자들은 자유주의자이든 보수주의자이든 모두 북한의 시장 개혁·개방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난 4~5년 동안 벌어진 북중 관계의 변화에 관해서는 내심 우려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북한에 미치는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남한 지배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바는,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되는 게 아니라 “북한은 중국의 속국[이 되고] 남한은 중국의 변방국으로” 남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한 지배자들은 한반도가 분단돼 남한이 마치 대륙과 단절된 ‘섬’처럼 남아 있는 게 불만이었다. 이것이 남한 국가의 성장에 제약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 지배자들 사이에서는 남한이 적극적으로 북한을 시장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북한의 대남한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이것은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중장기적 구상과 맞닿아 있으며, 이 점에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박근혜의 “통일대박론”을 단지 지방선거용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북한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엇갈리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박근혜가 “부산에서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가는 철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 후, 남한 정부는 러시아와 북한의 경협 프로젝트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국내 대기업들의 투자를 허용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북한의 나진항과 러시아의 하산을 잇는 철도 부설이다.

그러나 미국의 하위 동맹인 남한은 미국의 패권 유지 전략이 설정한 틀을 넘어 남북 관계나 경제협력을 진전시키기 어렵다.

지난 2월에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한미관계 보고서”에서,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개성공단 확대와 국제화를 추진한다면 미국과 의견이 충돌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런 지정학적 맥락을 이해해야만 최근 남북관계의 냉탕과 온탕이 반복되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전략 아래서,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간 경제협력을 중단했고, 박근혜 정부도 대북 강경책을 고수해 한때 개성공단의 가동이 중단됐다.

박근혜는 북한 비핵화를 경제협력 확대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남북 경제협력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여기에 남북 지배자들 간에 불신과 상호 적대도 상당하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 이의 영향을 받아 남북관계도 악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박근혜의 대북 정책은 냉탕과 온탕을 오갈 가능성이 크다.

냉탕과 온탕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재발견”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반도 전문가이자 〈한겨레〉 칼럼니스트인 존 페퍼는 이렇게 주장했다.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활용하고 싶어 하는] 미국이 동북아에서 운송로와 에너지 파이프라인망을 확장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는다면 … 여기서 북한이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닉슨이 소련을 견제하고자 중국에 접근했던 것처럼 “중국에 대한 균형잡기 전략”을 위해 오바마가 북한에 접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은 항상 더 나은 거래를 찾고 있[으므로] … 중국에 대한 의존을 끊고 미국과 더 긴밀히 공조하는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북한의 시장 개혁·개방은 북한 노동자들에게 진보일 수 없다. ⓒ사진 출처 stephan (플리커)

그러나 미국의 패권 전략의 이익에 북한 정권이 부합하는 것이 남북한 노동자들에게 진보일 리는 없다. 설사 남북관계가 진전돼 남북을 잇는 철도가 놓이고 북한의 시장 개혁·개방에 남한 자본이 적극 뛰어든다고 하더라도, 북한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옆으로 게걸음 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안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가 불안정한 까닭은 앞서 살펴봤듯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과 중국이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따라서 시장 개혁·개방을 중심으로 남·북한이 밀착하거나 심지어 북미 관계가 진전되더라도,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한반도의 불안정은 해소되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자본주의 시장 개혁이나 국가 간 외교 정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이 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하는, 운동을 건설하는 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