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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 최악과 차악의 시소게임

미국 대선
최악과 차악의 시소게임

이수현

오는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시소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선거 겨냥 테러설과 선거 연기설이 제기됐다.
〈뉴스위크〉(7월 11일치)는 국토안보부가 테러 위협을 경고하고 선거 연기의 법률적 문제 검토를 법무부에 의뢰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워싱턴 포스트〉도 국토안보부의 발의가 “유익하고” “적절한” 것이라며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7월 14일치 사설). 그런 조치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의심하기 좋아하는 소수의 과민 반응”이라고 일축했다.
이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이라크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전수하겠다던 부시 일당의 공언이 한낱 헛소리였음을 보여 준다. 그들 스스로 세계는커녕 미국조차 더 불안해졌음을 자인한 셈이고, 자신들의 명백한 잘못과 실패를 가리기 위해 자국의 헌법과 민주주의조차 무시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부시의 재선을 싫어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반부시” 정서가 폭넓게 퍼져 있다. 그 때문에 마이클 무어의 영화 〈화씨 9/11〉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심지어 상당수 공화당원들조차 부시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한 “골수 공화당원”은 〈화씨 9/11〉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영화를 보고 내린 결론은 부시 정부와 그 수혜자들이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범한 반부시 정서가 자동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케리한테서 부시와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미국 대선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단연 이라크 점령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부시와 케리의 태도는 거의 차이가 없다.
지난 7월 1일 는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주에 부시는 이라크의 새 임시정부에 제한적 주권을 이양했을 뿐 아니라 이라크의 치안 유지 부담을 더 많은 나라들과 분담하는 조처들을 취했는데, 이는 그 동안 케리가 촉구해 온 것이다. 케리는 부시가 전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해 왔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은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7월 15일 케리는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당선하면 첫번째 임기 말까지, 즉 2008년 말까지 미군을 이라크에 주둔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 부시 정부가 케리 정부보다 더 빨리 이라크에서 철수할지도 모른다고 시사하기까지 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 이라크 전쟁을 가장 강력하게 주창해 왔고 미국 기성 정치권 내에서 가장 우파적인 목소리를 대변해 온 신문 중 하나임을 고려하면, 케리는 미국 지배자들 ― 부시를 지지하는 신보수주의자들까지 포함해 ― 에게 자신이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임을 확신시키려 한 듯하다.
사실, 케리는 이라크 점령이 수렁에 빠지자 미군 철수가 아니라 병력 증파를 주장해 왔다. 그래서 민주당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 이후 폐지된 징병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오히려 부시 진영이 징병제 부활 계획 없다고 공식 부인할 지경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내년에는 징병제 부활을 공식 의제로 제기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화씨 9/11〉

또,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태도도 차이가 없다. 케리도 부시 정부의 네오콘 “매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케리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지방에서 건설하고 있는 이른바 “보안 장벽” ―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우 옳게도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장벽”이라고 비난하는 ― 을 지지한다.
몇 달 전에 케리는 “평화를 가로막는 장벽”이라며 “보안 장벽”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던지 최근 태도를 바꿔 이스라엘의 “정당한 자위권”의 일부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또 2002년 봄 요르단강 서안 지방의 예닌에서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을 학살한 이스라엘의 공세를 거듭거듭 지지했다.
케리 선본은 6월에만 무려 1억 8천2백만 달러(약 2천1백억 원)의 선거자금을 모았다고 발표했다. 이 액수는 4년 전 대선 당시 부시가 모금한 돈의 거의 갑절이고 올해 대선에서 부시 진영이 자신하던 선거자금의 우위를 거의 상쇄하는 것이다.
부시의 자금 출처는 뻔하다. 부시의 선거자금 2억 1천6백만 달러(약 2천5백억 원)는 대부분 314명의 파이어니어(10만 달러 기부자)와 211명의 레인저(20만 달러 이상 기부자)가 조달했다. 그들은 모두 기업의 고위 임원, 은행가, 투자가 등 부자들이다.
그러나 뭉칫돈을 긁어모으기는 케리도 마찬가지다. 케리 진영은 1억 달러(약 1천1백57억 원)의 선거 자금을 2백 달러(약 23만 원) 미만의 “소액 기부자들”을 통해 모금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선거자금 총액의 거의 절반은 “소액 기부자들”이 아닌 사람들한테서 모금한 셈이다.
더욱이 케리 자신이 기업의 돈을 받는 데 익숙하다. 지난 15년 동안 케리는 로비스트들한테서 가장 많은 돈을 받은 상원의원이었다. 그리고 그 보답도 확실히 했다. 예컨대, 자신에게 거액을 준 통신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적어도 두 개의 법안을 단독 발의했고 여섯 개의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레인저

그밖에, 경제 정책이나 시민적 자유와 민주적 권리, 복지 정책 등 다른 주요 정치 쟁점들에서도 부시와 케리의 입장은 별로 차이가 없다. 둘의 정책이 이렇게 비슷한 이유는 그들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의 사회적 기반이 모두 자본가 계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케리와 부시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낙태 문제는 케리 지지자들이 부각시키는 쟁점이다. 부시는 낙태에 반대하지만 케리는 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차이가 낙태권의 미래에 결정적 차이를 가져다 줄 만큼 중요한가?
사실, 이런 정도의 “차이”는 1992년 선거 때도 논란이 됐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빌 클린턴은 낙태 찬성론자였다. 그 전 12년 동안 백악관은 광신적 낙태 반대론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태권을 유명무실화하려는 우파들의 공세는 클린턴 집권기에도 계속됐고, 클린턴 정부는 이를 저지하는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결국 우파들의 끈질긴 공격 때문에 오늘날 미국의 카운티(우리 나라의 군에 해당하는 미국의 행정 단위) 90퍼센트에서 여성들은 낙태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실, 클린턴은 “선택의 자유법”을 제정해 낙태권을 보장하겠다던 공약을 포기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우파들을 모방해 낙태를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따위의 보수적 미사여구만 늘어놓았다.
오히려 클린턴 집권기는 그 전에 크게 성장했던 낙태 허용 요구 운동이 무장해제된 시기였다. 그 운동은 연방대법원이 합법적 낙태권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을 때 두 차례 대규모 시위로 판사들을 압박해 합헌 판결을 끌어내는 등 크게 성장했었는데, 그만 클린턴 정부에 대한 기대와 의존 때문에 사그라들었다. 역설이게도, 클린턴의 집권이 낙태 반대론자들에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따라서 선거 당시의 “차이”가 집권 이후에도 지속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그런 차이를 현실로 강제할 수 있는 동력이 다시 마비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지금 부시를 미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에서 케리에게 표를 던지려 한다. 그들은 케리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부시를 백악관에서 몰아내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나 진보 인사, 심지어 2000년 대선에서 랠프 네이더를 지지했던 급진파조차도 “차악론”을 퍼뜨리는 데 여념이 없다.
투표를 통해 부시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의 염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 태도다. 차악론 주창자들이 고려하지 못하는 사실은 부시를 제거하더라도 그가 표방하는 정책들은 여전히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책 집행자의 얼굴만 바뀔 뿐이다.
요컨대,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두 주류 후보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이 훨씬 더 분명하고 두드러진다. 따라서 투표 결과에 따라 평범한 사람들의 미래가 크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소수파가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뉴멕시코 주에서 새로 등록한 유권자의 25퍼센트가 민주당이나 공화당, 심지어 녹색당도 아니고 무소속으로 등록했다. 이는 예년 평균의 거의 갑절이다. 이것은 기성 정치에 대한 거부감뿐 아니라 새로운 대안에 대한 갈증도 보여 준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꾸준히 상승한 네이더 지지율이 지금 8퍼센트나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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