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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마르크스주의 - 중앙집중 없는 민주주의는 실패할 것이다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중앙집중 없는 민주주의는 실패할 것이다

콜린 바커

우리가 직면한 과제가 사회주의 조직의 형태를 좌우한다. 우리가 할 일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일반적 선전뿐이라면 가장 느슨한 형태의 결사체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팔짱끼고 앉아서 현실 투쟁과 실제 운동에 논평이나 하면 그만일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문제는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과 현실의 당면 투쟁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파업·시위·항의행동·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투쟁에 연루돼 보면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운동이 일정한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진행되고 뜻밖의 상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뒷좌석에 앉아 여행을 즐기면 그만이다. 이따금 조언이나 해주고 분명한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투쟁은 더 어렵고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천천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얼음장 같은 물로 뛰어드는 일종의 롤러코스터 타기에 더 가깝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느닷없이 새로운 운동이 나타나며, 위대한 승리도 있지만 심각한 패배도 있다. 투쟁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결정적 전환점을 통과한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갖가지 압력과 요구에 시달릴 때 우리의 태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주의 정당의 조직하기에 마법의 공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시기에 유효했던 전술들이 다른 시기에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패배와 후퇴의 시기에 필요한 과제들과 투쟁 고양기에 필요한 과제들은 서로 다르다. 평온한 보수적 시기에 유효했던 과제들은 혁명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과제

사회주의적 조직하기에는 기존의 일상적 방법과 새로운 창발성이 모두 필요하다. 평온한 보수적 시기에도 파업이나 이런저런 투쟁들은 벌어진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투쟁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혁명의 절정기에도 우리는 일상적인 조직화 과제들을 수행해야 한다. 신문 제작과 판매, 기금 모금 등등의 일 말이다.
“일상적” 과제에도 중앙집중의 요소가 필요하다. 신문을 제작하려면 편집자들이 필요하다. 편집자들은 나날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편집자들은 선출돼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지만, 조직원이 모두 참가하는 총회에서 정기 신문을 발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극소수 조직원의 경험과 관점만을 반영하는 사회주의 신문은 투쟁에 실제로 개입할 때 쓸모가 없거나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은 사회주의자들 간의 지속적인 대화뿐 아니라 당과 운동 ― 당원들이 적극 참가한 ―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도 반영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과제들에도 중앙집중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면 신속한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흔하다.
국가적 초점이 되고 있는 파업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방향 전환이 일어나면 ― 노조 지도자들이 파업을 배신하려는 낯익은 상황을 떠올려 보라 ― 신속하게 조정된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국 집중적 국회 압력 행사를 호소하거나 몇 시간 만에 전국 공통의 전단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압력 행동이나 전단 배포를 조직하려는 사람이라면 노조 내부 사정에 정통한 투사들과 재빨리 협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토론할 시간은 없다. 당이 대의원대회를 소집해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장이나 리스펙트[노동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으로 건설된 선거연합─〈다함께〉 편집자] 결성처럼 더 광범한 변화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전반의 변화를 요구한다. 최대한 광범한 토론과 논쟁이 없다면 당은 그런 변화를 추진할 수 없다.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아주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흔히 혼란과 저항에 부딪히지만 이를 극복해야 당의 진로가 바뀐다. 새로운 방향을 분명히 하고 사람들을 확신시키는 데서 논쟁 과정 자체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도 없다! 우리의 적들이 떠들어 대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회주의 정당은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확신과 헌신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확신과 헌신은 공유된 인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런 공통의 인식은 흔히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얻게 된다.

논쟁

민주주의에 뒤따르는 중요한 원리가 있다. 행동 계획이 논쟁을 통해 일단 결정되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이 원리는 당뿐 아니라 운동에도 적용된다.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의 아나키즘적 사고방식으로는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를 당할 뿐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하기 전에 투표를 한다. 다수가 파업에 찬성하면 [반대했던] 소수도 그 결정에 따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2백 년 동안 노동계급의 경험을 통해 발전해 온 피켓 라인의 의미다.[피켓 라인은 사용자측의 대체인력 투입은 물론 파업 참가자의 파업 이탈을 막기 위한 특별한 감시단이다. ― 〈다함께〉 편집자]
얼마 전 워싱턴 DC에서 반자본주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세계은행 회의장으로 통하는 진입로들을 모두 차단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한 지역에서 어떤 단체가 다른 모든 시위대를 무시한 채 그들 자신의 결정에 따르기로 방침을 바꿔 버렸다. 이 때문에 세계은행 대표자들은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항의 시위 전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는 중앙집중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중앙집중, 즉 조정과 지도를 일절 거부하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다.
민주주의와 중앙집중 ― 이 둘은 서로 필요하다 ― 의 구체적 결합은 현실 운동에 실제로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이해된다. 투쟁의 부침, 갑작스런 방향전환과 우여곡절 때문에 긴급한 과제들이 제기되는 그런 운동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무리의 사회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 지도자였던 사람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흔하다. 둘째,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은 모든 조직원을 최고의 선진 인자로 끌어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지도 자체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것은 아닐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 주변 사람들을 특정 견해로 설득하려 애쓰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누구에게 뭔가를 설득하려 애쓸 때 우리는 그들을 지도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 없는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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