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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다

토마 피케티의 경제학 책 《21세기 자본》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곧 출간될 《『자본』 해독하기》(Deciphering Capital)의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캘리니코스는 1970년대 말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자본》의 논리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 안의 말은 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덧붙인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이 5월 초에 미국 아마존 사이트에서 베스트셀러 2위로 올라섰다.

이 책은 암환자의 애잔한 삶을 다룬 소설과 디즈니 영화를 바탕으로 한 아동용 도서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에서는 분위기가 덜 뜨겁지만, 그래도 이 책은 신문·라디오·텔레비전에서 특집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랑스 경제학자가 쓰고, 통계 수치가 많고, 가격이 29.95파운드[약 5만 원]나 되는 거의 7백 쪽짜리 책이 이룩한 성과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책은 깜짝 놀랄 만큼 많이 팔려 나갔다.[지금까지 프랑스어판은 5만 권, 영어판은 25만 권이 팔렸다.]

자본주의의 불평등 양산을 통렬히 고발하며 “록스타 경제학자”가 된 토마 피케티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사진 출처 Sue Gardner

피케티 자신은 〈파이낸셜 타임스〉 미국판 편집자의 말로 “록스타 경제학자”가 됐다.

《21세기 자본》은 경제적 불평등을 다뤘는데, 이것이 피케티가 다른 경제학자와 구별되는 이유다. 위기의 결과이자 “1퍼센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불평등은 현재의 주요 정치 쟁점 중 하나다.

피케티의 책을 보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떠오른다. 고전파는 정치경제학을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학문 분야로 봤다.

그리고 피케티는 경제 동향을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것도 수학적 모형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류 경제학자들과의 차이다.

핵심적으로, 《21세기 자본》은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로운 경제학적 사회학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피케티가 기댄 이론적 토대와 그의 정치적 결론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부의 불평등

이 책의 큰 강점과 큰 약점은 모두 이 책이 부(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불평등을 다루는 많은 연구자들은 주로 소득 차이를 본다. 그러나 피케티는 옳게도 부의 분배와 그것이 변하는 방식에 관심을 둔다.

부자가 부자일 수 있는 이유(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는 무엇보다 그들이 경제적 자원을 지배하고, 그 경제적 자원 덕택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벌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소득과 부에 관한 통계 자료를 매우 잘 이용했다. 국제적 연구자 집단의 일원으로서 피케티도 그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일조했다.

그가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강점이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1790년대 프랑스 혁명기에 재산세를 도입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2백여 년 동안 자료가 꾸준히 축적됐다는 뜻이다. 물론 피케티는 미국·영국·독일도 중요하게 다룬다.

피케티는 결론으로, 1950년대 중반 사이먼 쿠즈네츠가 세심하게 만들어 낸 “법칙”을 논박한다. 쿠즈네츠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는 소득 불평등이 커지지만, 경제가 성장하면서 불평등이 완화된다고 주장했다.

피케티가 제시한 자료들을 보면 상황은 매우 다르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전인 1900~10년의 영국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당시 상위 10퍼센트의 부자들이 전체 부의 90퍼센트를 차지했고, 상위 1퍼센트는 거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영국만큼 극명하지는 않더라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은 산업혁명이 일어났어도 부의 주된 형태가 오랫동안 토지였던 사회들이다. 생산성은 비교적 낮았다.

피케티는 제인 오스틴[《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19세기 초 영국 소설가]과 오노레 드 발자크[《고리오 영감》으로 유명한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류 계층에 큰 관심을 뒀다. 이 상류 계층은 막대한 물질적 부를 소유해, 그들의 삶은 하인들의 삶과 확연히 구분됐다. 그리고 그들이 누린 생활수준은 오늘날의 평균 생활수준보다 몇 곱절 더 높았다.

그러나 그 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대불황,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면서 부가 파괴됐고, 국가가 하는 구실이 급격히 커지고, 과세 수준이 훌쩍 높아졌다.

1950년과 1970년 사이 프랑스에서 상위 10퍼센트 부자가 소유한 부는 전체의 60~70퍼센트로 떨어졌고,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한 몫은 20~30퍼센트로 떨어졌다.

하지만 저울은 다시 부자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10년 영국에서 상위 10퍼센트 부자는 전체 부의 70퍼센트를 소유했고, 상위 1퍼센트는 25~30퍼센트를 소유했다.

정착민 사회인 미국에서 부는 20세기 초에는 다른 나라보다는 덜 집중돼 있었지만, 1914~45년에는 분배 압박도 덜했다. 2010년 미국에서 상위 10퍼센트 부자는 전체 부의 70퍼센트 이상을 소유했고 상위 1퍼센트는 거의 35퍼센트를 소유했다.

소득 불평등

소득 차이는 부의 불평등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소득 차이는 1914년 이후 줄었다가 오늘날 다시 급격히 커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국민소득에서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 6~8퍼센트에서 2010년 거의 20퍼센트로 커졌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의 주요 요소는 바뀌어 왔다. 이제 토지는 부자들에게 중요한 부의 원천이 아니다. 지금은 봉급 차이가 소득 불평등에서 더 큰 구실을 한다.

피케티는 기술 변화로 고학력 종업원들의 봉급이 올라가기 마련이라는 흔한 설명에 격하게 반대한다.

피케티는 “초특급 경영인의 등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피케티의 용어로 초특급 경영인은 “상위 소득의 폭증”을 불러온 족벌기업에 의존하는 최고 경영자(특히 미국과 영국의)들을 뜻한다.

피케티는 “극단적 능력 중시주의”, “특정 개인들을 ‘승리자’로 만들어야 하는 현대 사회(특히 미국 사회)의 명백한 필요”, 그 승리자들에 대한 터무니없이 큰 보상도 비판한다.

피케티는 19세기 유럽에서 자본이 국민소득의 6~7배였다고 주장한다. 이 수치는 20세기 전반기에 2~3배로 떨어졌다가 현재 영국과 프랑스에서 다시 5배 정도로 커졌다.

그는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의 둘째 근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법칙이란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으면 부자들이 자기 소득을 모아 어마어마한 부를 쌓게 된다는 것이다. 피케티에 따르면, 그 조건은 1914년 이전에 나타났다가 오늘날에 다시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피케티 이론의 약점이 시작된다. 피케티는 모든 형태의 부가 자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토지, 기계, 아파트, 채권 등이 모두 자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이런 개념은 핵심적으로 주류 경제학의 자본 규정과 같다.

피케티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평가

이와 반대로, 칼 마르크스는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봤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본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자기 돈을 쓰게 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모음이다. 이 관계 덕분에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지배할 수 있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덕분에 노동자들이 이윤의 원천인 가치(무엇보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 소유를 자본 소유와 동일시하는 것을 최고의 물신화라고 봤다.

피케티가 지적하듯이,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사회적·경제적 변화의 하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잉여가치를 얻을 권한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잘못된 자본 개념 탓에 피케티가 보여 주고자 한 장기적 경향의 타당성도 약해진다. 이것은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의 책에 “21세기의 자본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마르크스의 위대한 업적을 계승하려는 포부가 피케티에게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비록 그는 《자본》을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불평등 심화에 관한 “핵심적 통찰”을 제공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관해 피케티가 한 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생산성이 장기적으로 떨어진다는 엄격한 가정을 깔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실 정반대로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생산력 발전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위기로 빠뜨리는 요인이라고 봤다.

피케티는 마르크스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프랑스 철학자 세 명(장-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알랭 바디우)을 분노를 담아 공격하는 이상한 각주를 책의 끝부분에 달아 놓기도 했다.

피케티는 자신이 포착한 극심한 불평등 추세를 끝낼 정치적 해법으로 부유세를 제안한다. 그는 미국과 영국 국가가 1940년대에 부와 소득에 “거의 몰수” 수준으로 과세한 사례를 든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보지 못한다. 부의 분배가 다시 자본 쪽으로 유리해졌듯이, 과세 제도도 (특히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며)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가차없이 불평등을 일으키는지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되겠지만) 개혁주의가 아니라 혁명이 필요한 이유도 보여 준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8월에 방한해 노동자연대가 주최하는 ‘맑시즘2014’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4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