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오후 2시 종묘공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김대중 퇴진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 날 집회는 대우차 노동자, 보험3사 강제퇴출에 항의하는 사무금융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고 있는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과 7∼8백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김대중 퇴진의 목소리를 높였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개혁을 파탄시키는 김대중은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홍근수 목사도 "미국에 굽실거리는 김대중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미국의 눈치만 보는 김대중 정부는 물러가라"고 주장했다.

한 사무금융 노동자는 김대중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표현했다. "대선 때 민주노총 소속 연맹에서 유일하게 김대중 간담회도 개최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느냐. 넥타이 부대가 정권에 등을 돌리면 그 정부는 끝장이다." 작년 말 은행 노동자들에 이어 "중산층"이라 불리던 넥타이 부대가 또다시 선봉에서 투쟁의 결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 퇴진', '구조조정 분쇄', '정리해고 철회', '대우차 GM 매각 반대', '국가보안법 철폐·구속된 민주노동당원 석방' 요구가 새겨진 풍선 3천여 개를 준비했다. 이것은 행진 참여자들과 행진을 구경하는 시민들에게 나눠줄 목적으로 제작됐다.

집회의 요구 사항이 적힌 풍선을 시민들에게 나눠 주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다. 수천 명의 행진 대열을 구경하며 팻말이나 배너 등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들은 행진에는 참여하지 않더라도 풍선을 드는 것을 통해 시위대에 지지를 보낼 수 있었다.

풍선 3천여 개는 민주노총의 요청에 따라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제작했는데, 학생 당원들은 집회 시작 2시간 전부터 풍선을 불고 노동자들에게 풍선을 나눠 줬다.

민주노총 명의가 적힌 풍선에 민주노동당원 석방 요구가 2백여 개가 포함된 것은 인상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민주노동당원들을 구속한 것은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시도이므로 노동자들이 구속된 학생 당원들을 방어해 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행진 일방 중단 뒤 동국대행 유감

이 날 집회에는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애초에 행진은 명동성당까지 하기로 돼 있었다. 이것은 민주노총 홈페이지의 집회 공식 일정에도 명시됐던 바다. 그러나 행진은 아무 해명도 없이 탑골 공원 앞에서 정리됐고, 대열은 느닷없이 해산한 뒤 동국대로 이동했다.

경찰이 행진을 방해하거나 대열을 습격하지 않은 조건에서 자진해서 토요일 도심 행진을 중도에 그만 두고 동국대 앞 화염병 시위로 급작스레 계획을 바꾼 것은 적절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충분한 설명도 없이 '비선'을 통해 각 참여 단체에게 변경 사실을 통보했다. 우리 그룹도 종묘 공원에서 본 집회가 끝날 쯤에야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행진 대열이 탑골 공원에 다다랐을 때 사회자가 연단에 올라가 '대시민 선전전'을 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 말은 동국대로 대열이 이동하는 것을 경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거짓말은 경찰을 제대로 속이지도 못한 채 우리 편의 일부를 속이는 결과를 낳곤 한다.

이 집회를 지켜보면서 지지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던 시민 또는 미조직 노동자들은 정말로 행진이 끝난 줄 알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동국대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던 일부 연맹 소속 노동자들도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실제로 집회 대열은 종묘에서 3천여 명이었다가 동국대에 갔을 때는 1천여 명 미만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시민 선전전'을 하는 대신 대열이 갑작스럽게 동국대로 이동하자 많은 집회 참여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한 활동가는 "왜 합법적으로 보장된 평화 행진을 이용하지 않고, 애초에 계획되지도 않은 화염병 시위를 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못내 아쉬움을 표현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풍선을 나눠주다가 갑자기 화염병을 드는 게 올바른 거냐"며 정당한 문제제기를 했다.

화염병 시위와 민주노총의 총파업 자제 결정

동국대 안으로 이동한 대열은 동국대 학생회관 앞에서 약식 집회를 한 뒤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사수대가 동국대 정문 앞 도로의 차량을 통제하자 시위 대열은 차도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다.

당시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경찰의 침탈을 소수의 사수대가 막기는 어려웠다. 대열 지도부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시도를 해 불필요한 피해를 불렀다. 경찰은 대열을 무자비하게 습격하며 폭력성을 드러냈다.

경찰이 습격할 때 대열의 대부분은 다시 학교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지만, 일부 대열은 경찰에 쫓겨 동대문 방향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그 쪽에서도 무장한 경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경찰 지휘자는 "다 잡아 들여"라고 지시했고, 전투경찰들은 순식간에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정문 앞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사수대와 전투 경찰 사이의 공방전이 이어졌는데, 사실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운 전투였다. 이런 방식의 시위는 집회 참여자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대열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지지자들로부터 대열을 분리시키고 기성 언론의 왜곡과 경찰력 강화의 빌미를 제공하곤 한다.

화염병 시위는 지난 3년 넘게 노동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김대중 정권에 대한 분노, 특히 대우차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시킨 데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 또 화염병 시위는 대단히 용기 있고 다른 시위보다 절박해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서고 싶어 하는 국가는 화염병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돼 있다. 화염병 시위로는 국가에 타격을 가하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사장과 정부에 맞선 가장 효과적인 투쟁은 그들의 이윤에 타격을 주는 대중 파업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선언해 놓고도 총파업을 자제하기로 결정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이 집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3월 15일, 총파업이냐 총력 투쟁이냐를 둘러싸고 8시간 30분 동안 격논을 벌인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연대 파업 조직은 회피하면서 그것을 화염병 시위로 대체함으로써 산하 노조 조합원들의 불만을 달래려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다.

화염병 시위는 매우 격렬하고 강도 높은 투쟁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 효과는 몇 만이 참여하는 파업의 위력보다 비할 데 없이 약하다.

김대중 정부에 항의하는 가장 위력적인 방법은 소수의 화염병 시위가 아니라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조가 항의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