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일반이사회 도하합의안 통과

김어진

협박, 매수 그리고 배신

7월 말 WTO의 도하합의안 통과는 미국과 유럽연합 같은 강대국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WTO의 주요 강대국들은 지난해 9월 칸쿤 각료회담이 무산된 뒤 어떻게 해서든 합의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특히 지난해 11월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주 자유무역지대 협정을 위한 회의가 결렬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번에 통과된 도하합의안은 사실상 칸쿤 회담 때 제시된 합의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칸쿤 회담 결렬의 주된 이유였던 농업협상안이 통과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합의안이 나오기까지 미국과 유럽연합의 무역대표부들이 한 일은 이랬다. 협박, 매수, 양보를 과장한 사기, 양보 시사하면서 강대국에 유리한 조항 슬쩍 밀어 넣기, 비밀협상….
미국의 무역협상 대표 로버트 졸릭과 유럽연합의 대표 파스칼 라미는 “이번 합의안은 개발도상국을 위한 힘의 균형” 운운하며 마치 강대국이 엄청난 양보라도 베푼 양 행세했다.
다급해진 미국과 유럽연합은 농업보조금 감축을 선진국과 개도국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했다. 이 때문에 브라질과 인도 같은 G20 농산물 수출 개도국의 입장이 바뀌었다. G20에 대한 환상이 위험하다는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의 무역대표부가 “양보” 운운하는 것은 완전한 위선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협상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농업보조금은 합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불균형적 감축이 되지 않도록 탄력성을 부여한다.”는 내용은 완전히 카길이나 몬산토 같은 곡물 다국적기업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다.
“민감한 품목에 관한 고려”와 “민감 품목에 관한 낮은 관세 감축률 보장”은 유럽연합의 대표자들이 자국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구절이다. 되레 “관세감축에 대한 개도국 우대가 이전 초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더욱이 미국과 유럽연합의 무역대표부는 협상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의 대표들을 협박하고 매수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제네바에서 일반이사회가 열리기 2주 전 부시는 AGOA(아프리카 성장촉진법)을 2015년으로 연장했다. 이 법은 몇몇 핵심 아프리카 나라들을 유인하는 핵심 구실을 했다. 이 법으로 아프리카의 대미 수출은 3년 동안 세 배가 늘어났다. 이 법안의 기한은 원래 올해 9월에 끝나게 돼 있었다.
WTO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특정 수혜국가들에게 원조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켰다. 밀레니엄 챌린지 기금(개발 원조 기금)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기금은 실오라기처럼 흐르는 수돗물마냥 아주 간헐적이고 아주 소규모일 뿐이다.
매수와 양보보다는 협박이 더 주된 방식이었다.
미국은 도하합의안에 서명하지 않으면 식량원조를 받지 못할 거라고 협박했다.
협박은 일반이사회가 열리기 전부터 있었다. 회담 며칠 전 유럽연합은 케냐에 대한 6천20만 달러 상당의 원조를 철회했다. 회담에서 “[케냐가] 너무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일본은 금융 자유화를 더욱 촉진시킬 싱가포르 이슈의 제거를 주장하지 말라고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한테 압력을 넣었다.
협상 과정은 철저하게 비민주적이었다. 주요 협상 부분이었던 농업 협상은 오직 5개 회원국(미국·유럽연합·호주·브라질·인도) 사이에서만 열렸다. 개발도상국들의 주요 결정은 브라질과 인도가 좌지우지했다.
농업 분야 위원장인 뉴질랜드 대사는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5개 이해 국가들한테서 정치적 지휘를 받고 있다.”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그룹을 철저하게 분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비농산물 분야 시장접근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뽑아서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유연한 입장을 가진 아프리카 나라들과 한 방에 배치했다.

도하합의안이 가져올 재앙

도하개발의제 합의안의 파장은 농업 부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비농산물 시장 접근 부분에서 주요 선진국의 자본가들은 관세율이 높을수록 높은 관세 감축률이 적용되는 방식 때문에 무역에서 더 많은 이득을 얻을 것이다. 그럴수록 개도국들의 산업은 더욱 붕괴될 것이다.
서비스 협상의 파장은 더욱 심각하다. 내년 5월까지 시장 개방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개방계획서 제출을 다시 하도록 돼 있다.
“노다지”라고 알려진 한국의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다국적기업들이 돈벌이를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다. 전력과 가스 부문도 개방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WTO의 서비스 협상 대상에는 다음 사항들이 포함된다. 건설, 건축, 시설 관리, 토목 및 기계 공학, 은행과 보험을 포함한 금융 서비스, 연구개발, 통신, 우편 서비스, 음성 및 화상 통신, 정보 기술, 관광과 여행, 도로 건설 및 유지를 포함한 환경 서비스, 쓰레기 수거, 오물 처리, 식수 공급, 조경 및 도시 계획, 오락, 문화, 스포츠 서비스, 도서관, 기록 보관소, 박물관, 출판, 인쇄, 광고, 수송, 교육, 의료, 인간과 동물 보건…. 다시 말해 공기를 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시장에 다 내맡기는 것이 바로 서비스협상이 추구하는 목표다.
WTO 도하개발의제 반대는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농민들의 목을 조이는 WTO와 노무현

WTO는 농민들의 핏줄이나 다름없는 농업보조금 삭감을 합의함으로써 전 세계 가난한 농민들의 목을 조이고 있다.
WTO의 농업협상안이 통과되자마자 노무현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타결된 뒤 농가를 7만여 호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추곡수매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도 계획하고 있다.
이것은 농업을 신자유주의에 더 내맡기는 효과를 낼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이 가장 경쟁력이 없는 산업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경쟁력이 없으므로 고사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게 농업에 대한 신자유주의 해법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통과될 때 농민한테 10년 동안 1백19조 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으니 농민들한테 냉정하게 등을 돌린 것은 아니지 않냐고 말해 왔다.
그러나 1백19조 원의 대부분은 농림부 예산이다. 농림부 예산을 농민들에 대한 지원금이라고 둘러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민들한테 들어간 돈이라고 주장하는 57조 원 가운데 실제 농민들한테 지원된 돈도 겨우 2조 9천억 원에 불과하다.
농사를 지을수록 빚이 더 늘어난다는 농민들의 외침은 사실이다. 청송 지역에서는 농가부채 문제로 5월 말 현재 30여 명이 목을 매거나 음독자살을 했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그러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적대로 “험난한 과정은 지금부터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도 “역사적이긴 하지만 그 의미가 과장됐다”며 “무역자유화 지침 내용이 모호하며 일부 핵심 사항에 관한 결정이 미뤄져 앞으로 관세 부과 및 보조금을 둘러싼 갈등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내년 12월 홍콩에서 열릴 WTO 각료회담에서 세계 자본가들은 세계 민중의 삶을 유린할 비밀 협상을 매듭지으려 한다. 이에 맞서 도하개발의제 합의안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투쟁이 필요하다. 각료회담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년이 긴 시간은 아니다.
홍콩 노총도 각료회담에 맞서기 위한 국제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려면 WTO에 반대하는 대중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이번 합의안 통과가 보여 준 가장 큰 교훈 하나는 브라질과 인도 협상단 같은 G20 국가들은 언제든지 세계 민중의 열망을 완전히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식량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국익의 관점에서 자주적인 협상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라고 논평한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의 성명서는 우려스럽다.
9월 10일 칸쿤 1주년 식량주권 사수 결의대회에서 많은 농민들의 분노가 표출될 것이다. 많은 농민들은 WTO를 반농민기구로 여기고 있다.
투사들은 농가부채 탕감, 추곡수매가 등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충심으로 지지해야 한다.
동시에, 이 투쟁은 8월 중순 집중될 쌀 재협상 쟁점만이 아니라 WTO 도하개발의제 합의안에 관련한 쟁점들도 함께 제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