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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종파 간 갈등은 수천 년 된 악습인가

 중동에서 나타나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같은 종파주의적 분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레바논 사회주의자 바셈 치트가 종파주의를 “전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주장에 반대하며 중동 지역에서 발전하고 위기에 빠지는 자본주의에 종파주의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랍 혁명이 터진 뒤 중동의 종교적 종파주의가 무슨 구실을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늘고 있다. 이 쟁점을 다루는 저서는 대부분 종파주의 문제를 문화적 관점에서 살핀다. 이러한 접근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먼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곧,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뒤 누가 권력을 계승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이 일어난 서기 632년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런 분석들은 역사가 다른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적 권능을 발휘한다고 여긴다. 최초의 종파 분열 이후로 일어난 사회적 발전과 변화는 모두 무시된다. 그러나 종파주의는 근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종파주의는 과거를 끌어다 쓰는 현재의 일이다. 그 목적은 옛 원한을 갚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다.

현재의 목적을 위해 역사를 끌어다 이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칼 마르크스가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썼듯이, 그것은 근대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후다. “정확히 이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부르주아지는 ─ 치트] 불안에 떨면서 과거의 정신을 일깨워 써먹는다. 과거의 정신으로부터 이름과 전투 구호와 복장을 빌어 와, 유서 깊은 가면과 차용한 언어 속에 세계사의 새 장면을 투영한다.”

종파주의는 오늘날 아랍과 중동 사회의 모순이 낳은 산물이다.

종파주의가 가장 널리 퍼진 때는 항상 위기가 닥친 때였다. 1860년대 레바논 산에서 일어난 마로나이트와 드루즈의 갈등은 자본주의가 도입되며 생겨난 모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75~90년의 레바논 내전도 비슷한 예이다. 이 때 일어난 종파주의는 정치적 갈등이라는 성격이 분명했다. 당시의 종파주의는 새로 들어선 레바논 국가의 위기를 보여 주는 징후였고, 대중 운동을 파괴하려는 전략이었다.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은 종파주의적 갈등이 터져 나올 여건을 마련해 줬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오랫동안 이용한 종파주의적 정책을 다시 부추김으로써 그랬다. 최근 시리아와 바레인, 그리고 가끔 이집트에서 나타나는 종파주의적 갈등은 이 지역 곳곳에서 혁명적 투쟁이 발전하고 있다는 맥락을 놓치면 이해하기 힘들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종파주의는 위기를 새 이데올로기로 다시 규정하는 데서 언제나 중심적 구실을 했다. 곧, 종파주의는 “새” 헤게모니를 재생산해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종파주의는 대체로 아랍 민족주의(또는 국민적 단결의 부족)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종파주의는 민족주의를 반영한다.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와 종파주의 모두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다. 그 둘은 반식민주의 정치의 밑바탕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쓰였다. 아랍 민족주의는 세속주의 가면을 썼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민족주의가 자신의 지배력을 지키려고 계속해서 종교를 차용하고 이용하고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집트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수니파 이슬람에서 권위가 가장 높았던 알 아즈하르 사원을 현대적으로 개혁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알 아즈하르 사원이 무슬림형제단과 그보다 더 보수적인 와하비즘(사우디아라비아가 부추기는)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다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시리아의 독재자 하피즈 알 아사드는 종파주의와 혈연 통치를 도입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의 바트당 정권은 이슬람 사원을 짓고, 이슬람 학교에 자금을 지원하고, 수니파 종교기관에 주는 보조금을 늘리고, 대중매체로 이슬람을 선전하고, 보수 이슬람을 장려해 자기 정권의 정통성을 마련하려고 했다. 1973년에 아사드는 세속적이었던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하고 선언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현상의 다른 모습은 종파주의가 민족주의를 흡수한 것이다. 이란의 시아파 민족주의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수니파 민족주의가 있다. 레바논에서는 종파주의와 민족주의가 좀 덜 단단히 융합해 나타났다. 레바논 국가는 다유쉬(공동체 생활과 국민적 단결)를 그들의 국가 정체성으로 규정하지만, 현실에서는 종파주의적으로 처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종파주의를 “반(反)민족주의”나 “전근대성의 표출”로 본다. 그 이유는 현대 아랍과 중동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이 조야하고 유럽중심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로 말미암은 근대성)이 유럽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와 종교 제도·사상에서 단절하는 것을 근대성으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와 자본주의는 단일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레온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불균등 결합 발전” 과정을 거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 “근대성”과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결코 단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지역마다 다르게 거쳐 온 역사적 과정의 영향을 받는다.

아랍과 중동 사회에서 종교가 정치를 표현하는 데서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하는 까닭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느리고 긴 혁명적 변화를 거치지 않고 서구의 식민 지배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 대응으로 민족주의와 종파주의가 생겨났다. 민족주의와 종파주의는 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거친 사회 변화의 부산물이다.

식민 지배 이전에 중동의 종교기관은 서구와 달리 지위가 높지 않았다. 중동의 종교기관은 왕정에 굽신거렸다. 오스만 제국에서 카눈(세속적 법체계)은 샤리아(이슬람 율법)와 공존했다.

봉건 권력이 약해지던 시기에 중동의 종교기관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토지를 얻거나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 자본가들의 투자를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넓혔다.

새로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들은 (많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종교와 혁명적으로 결별하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의 권위를 인정해 주면서 등장했다. 특히 이슬람 가족법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양상이 널리 나타났다.

혁명

그런 점에서 종파주의는 여러 유형이 있다. 부르주아 정치가 발전한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가 종교와의 관계에서 경쟁과 헤게모니에 관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집트에서 콥트 기독교는 무슬림형제단과 군부가 벌인 전쟁의 무대였다. 군부는 콥트교도들을 무슬림형제단의 종파주의적 “테러”에서 보호한다고 자처했다.(그러나 군대는 콥트교 교회를 직접 공격하거나 공격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수니파 탁피리” 집단이라는 “어둠의 세력”에게서 소수 종교를 보호한다고 자처했다. 동시에 레바논의 시아파 정치 세력인 헤즈볼라는 “미국-이스라엘-탁피리의 음모”에 대항하고 이맘 알리(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의 딸인 지아나브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아사드 정권을 도와 [시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했다.(자이나브는 서기 680년에 벌어진 카르발라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갔는데, 헤즈볼라는 “자이나브가 두 번 잡혀서는 안 된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것은 헤즈볼라의 군사적 개입이 가진 민족주의적 측면과 종파주의적 측면을 모두 보여 준다.

알카에다에 가맹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와 그 경쟁 세력인 알 누스라 전선은 모두 시리아에서 새로 등장한 종파주의적 조직들이다. 그 둘은 자유시리아군(FSA)이 약하고, 시리아 정권이 대중 항쟁을 무참히 짓밟는 상황에서 등장했다. 그 둘의 뿌리 깊은 종파주의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조직들이 다른 조직과는 달리 규율이 잡혀 있다고 본다.

종파주의와 민족주의 모두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지배계급의 통치를 위협하는 주요 세력)을 길들이고 분열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허구의 “영웅적 전투” 속에서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고 자신들의 위기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을 길들이고 분열시켜야 한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 사회는 영웅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부르주아 사회는 살아남으려면 영웅주의, 희생, 테러, 내전, 전쟁이 필요하다.

“부르주아의 검투사들은 로마 공화국의 근엄한 고전에서 이상과 예술 형식을 찾았다. 그것들은 자기 기만으로, 그들의 투쟁에 내포한 부르주아적 한계를 감추고, 위대한 역사적 비극의 주인공인양 그들의 열정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것들이다.

기존 질서가 만들어 내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종파주의와 민족주의 정치가 자라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좌파가 도전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종파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종파주의가 “유일하게 가까운” 해결책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종파주의를 따르면 보호받거나(레바논의 시아파 노동자들이 헤즈볼라의 정치를 받아들이고 수니파 노동자들이 여러 수니파 정당들을 지지하듯)나 승리할 수 있는 듯 보인다(시리아인들이 자금이 풍부하고 더 잘 조직된 종파주의적 단체에 가입하듯이). 기댈 만한 혁명적 대안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집트 노동자들이 군부나 무슬림형제단을 당장의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종파주의를,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술 정도로만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현대 아랍과 중동 사회의 성격 자체와 그 안에서 종교가 하는 구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종파주의가 존재하고 유행하는 역사적 조건을 따져 봐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종파주의에 대항할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는 현실을 드러낼 뿐 아니라, 종파주의 이데올로기에도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혁명적 세속주의는 “세속적 민족주의”나 “세속적 자유주의”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한 국제적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