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재성 기자는 빅토르 세르주의 《한 혁명가의 회고록》을 비평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작 세르주는 트로츠키 및 그 추종자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썼다.

마치 세르주가 스탈린 VS 트로츠키 사이에서 제3의 독립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세르주는 스탈린에 투항하지 않고 1923년 초에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파적 반대파에 합류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논쟁하기도 했지만, 트로츠키를 마지막까지 존경했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했다. 크게 세 가지 문제였다. 1921년 러시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의 의미, 1930년대 스페인 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의 중간주의(혁명적 입장과 개혁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줄곧 동요함) 노선, 스탈린주의 공산당을 대체할 새로운 혁명적 국제 단체인 제4인터내셔널 창설.

여기서는 이 중 특히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에 대한 세르주의 태도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재성 기자가 볼셰비키의 강경 진압에 세르주가 반발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틀렸다.

세르주는 볼셰비키의 크론시타트 진압에 전형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볼셰비키 정권이 타협하지 않고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반란군을 백군 장군들이 지휘하는 ‘반혁명가들’로 비방한다며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와 반란군의 전투를 중재하려고 개입했다. 내전 한복판에서 집권당의 규율 있는 당원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크론시타트가 더는 백군으로부터 페트로그라드를 지키는 요새가 될 수 없음이 세르주에게 분명해졌다. 그러자 그는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지지했다.

크론시타트의 진실은 반혁명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반란을 진압해야 했거나(트로츠키는 이를 두고 “비극적 필요”라고 말했다), 아니면 그 반대였다. 세르주는 이 두 세계에서 최상을 취하려다 잠시 어중간한 태도를 취했던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