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세르주(아래 사진)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살았던 저술가이자 혁명가다. 조지 페이지스가 세르주의 삶을 돌아본다. 조지 페이지스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당원이고 UCL대학교(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프랑스학부 부교수다. 《마르셀 마르티네: 혁명의 시인》, 《사랑과 소설》 등을 썼고, 빅토르 세르주의 《한 혁명가의 회고록》의 영어판 공동 번역자이기도 하다. 다른 공역자 피터 세지윅도 SWP 당원이다.


빅토르 세르주는 혁명적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1919년에 러시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했다. 세르주는 20세기 전반기의 혁명적 경험들을 담은 많은 글과 책과 소설을 썼다.

세르주는 1890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러시아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벨기에로 망명 온 집안이었고 매우 가난했다. 그의 부모는 민중주의 테러리스트 운동단체인 나로드나야 볼랴(민중의 의지)에 공감했다.

세르주는 이렇게 썼다. “인생의 의미는 오직 역사를 만드는 활동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데 있다고 나는 배웠다. 역사를 만드는 활동이란 인간을 굴종케 하는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고, 인간을 해방시키고 성장시키는 투쟁에 모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세르주는 가족이 겪었던 빈곤에서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그의 동생 라울은 9살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세르주는 벨기에 사회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 그러나 벨기에 국가가 아프리카의 한 지역을 공식 병합하는 것을 벨기에 사회당이 지지한 1908년에 세르주는 벨기에 사회당을 탈당했다.

벨기에 사회당의 보수성에 넌더리가 난 세르주는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 벨기에에서 노동계급 운동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주요 조류였던 아나키즘에 끌렸다.

아나키스트들은 주류 사회를 거부했다. 그들은 출세하거나 의회 정치에 참여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세르주는 비타협적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게 끌렸다. 그 아나키스트들은 절도 같은 불법 행동을 주로 활용했다.

세르주는 ‘개인주의자’들의 신문 〈아나키〉의 편집자가 됐다. 비록 나중에 그들의 행동을 집단 자살 시도라며 비판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래도 세르주는 경찰에 체포됐을 때 ‘개인주의자’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권위

1917년에 출소한 세르주는 스페인으로 갔다. 러시아 2월 혁명에 고무된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아나키스트들이 이 봉기를 이끌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위를 모두 거부했으므로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지배계급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마침내 봉기를 짓밟았다.

세르주는 내전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1919년 1월 혁명 러시아에 도착했다. 다섯 달 뒤 그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세르주는 볼셰비키당이 혁명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알았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지키고 지배계급을 분쇄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적군을 창설해 백군에 맞서 혁명을 수호했다. 반혁명 세력은 아주 악랄한 수단까지 이용하며 옛 차르 시절의 지배계급을 복원시키려 했다.

세르주는 백군과 백군을 지원한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혁명을 지키려면 억압적 조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세르주는 이렇게 썼다. “자신들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얼마나 큰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숭고한 일인지를 자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했다. … 그 임무는 전체 인류와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연합인 코뮌을 위한, 인민의 연합인 인터내셔널을 위한, 여성 해방을 위한, 아동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우리 계급 자신의 끊임없고 철저한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혔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맨 처음 시작하는 영광을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가 누리게 됐다는 사실은 지독한 불행이다.”

이중의 의무

적색 테러가 증가했다. 공산당 관료들의 권력이 커졌다. 그들의 부패와 특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현실을 보며 세르주는 혁명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이끌어 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반동적 요소에 맞서 투쟁을 벌여야 한다. 사회주의는 [살아남으려면] 옛 정권의 무기를 들어야 하지만, 그 무기는 양날의 검이다. … 그래서 그 무기를 사용할 때는 비판, 반론, 시민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20년쯤에는 이것들이 이미 한참 모자란 상황이었다.”

혁명가들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혁명이 생존하려면 선진국들로 혁명이 확산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산업이 크게 발전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은 1918년에 제1차세계대전을 끝냈다. 그 뒤로도 혁명은 계속됐다. 세르주는 독일로 갔다. 1923년 10월 말에 봉기가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독일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원래는 혁명을 확산시키기 위해 결성됐다)은 노동계급에게 봉기를 위한 정치적 준비를 시키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노동자들은 봉기를 일으키자는 호소에 수동적인 반응을 보였다.

봉기가 실패한 바로 그 주에 독일의 고위 장관과 장성들은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주최한 10월 혁명 기념 연회에 참석했다!

똬리 틀기

세르주는 당시 상황이 크게 모순됐다고 느꼈다. 한편에서는 연속혁명이 전개되고 있었다. 연속혁명은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확산시킨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관료들이 어떤 사상을 키우고 있었다. 그 사상은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일국사회주의론-옮긴이]이었다.

레닌은 관료들이 위험한 세력이 됐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그 기계를 조종하는 것 같겠지만 사실 그 기계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핸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게 됐다.”

1925년 세르주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이미 죽고 없었다. 세르주는 반대파에 합류해 트로츠키와 함께 혁명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혁명가들은 1928년 관료들(이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관료들을 이끈다는 것이 분명했다)에게 패배했다. 세르주는 옥고를 치르다 중앙아시아의 오렌부르크로 유배를 갔다.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6년 세르주는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거치며 트로츠키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들은 곧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세르주는 그 “옛 친구”에 대한 존경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를 피해 멕시코로 갔고, 빈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세르주의 묘비명은 그의 시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에서 따왔다. 이 시는 투쟁 속에서 산화한 이들을 추모하는 시였다. 그러나 이 시는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다. “열정 넘치는 모험이 계속된다. 그 길에 희망이 있다. 그대의 차례는 언제인가? 내 차례는 언제인가? 그 길에 희망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혁명에 함께하자고 호소하다

빅토르 세르주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간부가 됐지만, 계속해서 아나키즘의 장점에 호의적이었다. 1920년 세르주는 《아니키스트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소책자를 써 아나키즘을 혁신하자고 호소했다.

그 소책자에서 세르주는 이렇게 말했다. 아나키즘이 “자기 머릿속에만 있고 공상적인 신조를 고수하거나 작은 종파로 남아 있으려 하지 말고, 노동계급과 혁명 운동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르주는 아나키즘이 혁명 운동에 이론적으로 중요하게 기여한 바를 아나키스트들에게 상기시켰다. 국가에 대한 적대, 애국주의 반대, 지배계급 생산수단의 몰수 같은 것들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돼 있던 주류 노동자 정당의 무기력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던 사람들은 볼셰비키였다. 비록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는 방식으로 지배계급을 물리치고 혁명을 완수하고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지만 말이다.

세르주는 아나키스트들에게 혁명 바깥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혁명을 지키고 나머지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도우라고 호소했다.

인간 동기의 역학을 밝히는 소설

세르주는 “역사 저작”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소설을 즐겨 썼다. 그는 소설이 인간의 마음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 인간 동기의 역학, 인간 내면에서 작용하는 역동성과 모순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대다수 사람들이 내심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툴라예프 사건》에서 세르주는 스탈린이 정적을 체포하고 살해할 구실로 삼았던 살인 사건을 다뤘다.

《정복당한 도시》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겨울의 페트로그라드를 그렸다. 세르주는 당시의 극심한 궁핍과 그런 궁핍 속에서도 살아 있던 사람들의 익살을 담았다.

세르주는 위나니미슴[집단은 개인을 초월한 독자적 생명과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믿은 20세기 초 일부 프랑스 시인들 중심의 문학 사조-편집자]의 영향을 받았다. 위나니미슴은 주요 개인이나 가문에 초점을 맞추는 고전 부르주아 소설의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급진적 문학 사조였다.

위나나미스트들은 문학의 새로운 임무는 인간의 집단적 의식을 추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나니미슴은 공통의 역사적 힘의 영향을 받은 운동 속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사회 집단의 모습을 그렸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3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