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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흑인 반란:
계급적 분노가 들끓었던 1992년 LA

1991년 미국은 걸프전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가을 소련이 붕괴했다. 미국 지배계급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1990년 여름부터 미국 경제는 침체에 빠져 있었다. 실업률이 올라갔다. 노동계급의 삶은 급격히 불안해졌다.

1991년 3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에서 경찰 네 명이 흑인 로드니 킹의 차를 세우고 그를 잔혹하게 구타했다. 행인들이 경찰의 폭행 장면을 촬영해 폭로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로드니 킹은 강도죄를 뒤집어쓰고 2년형을 받은 반면, 가해 경찰들은 1992년 4월 29일 무죄 평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에 분노한 흑인들은 그날 밤부터 닷새 동안 소요를 일으켰다.

흑인들은 분노와 박탈감을 약탈과 방화로 표현했다. 평소 흑인에게 가혹했던 경찰과 상점들이 첫 번째 표적이 됐다.(수치스럽게도 한국인 상점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류 언론은 ‘난폭한 흑인들의 폭력’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사태의 계급적 성격은 분명했다. 이 소요 사태는 인종 간의 대립이 아니었다. 시장 톰 브래들리, 경찰총장 윌리 윌리엄스, 합참의장 콜린 파월 등 진압 명령을 내린 자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또한 직장·경찰서·감옥에서 흑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라틴계 빈민들과 백인들도 반란에 가담했다. 초기에 체포된 5천 명 중 흑인은 38퍼센트밖에 안 됐다.

수십 개 도시에서 연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가한 흑인과 백인들은 로드니 킹의 석방을 촉구하며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를 함께 외쳤다.

결국 50여 명이 죽고 1천7백여 명이 부상당한 끝에 군대가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미국 정치 지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계급의 처지가 1992년 대선에서 주요 의제로 부상한 것이다.

걸프전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부시는 타협적 제스처를 취하다 공화당 내 우파들의 뭇매를 맞고 자멸했다.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은 주요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와 부유층 세금 인상을 약속한 덕에 당선할 수 있었다. 12년 만에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다.

물론 클린턴은 바로 배신했다. 공공부문 투자 예산을 감축했다. 법인세를 인하하고 복지 수혜를 엄격히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43억 달러를 들여 경찰특공대의 무장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LA 흑인 항쟁이 보여 준 분노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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