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은 유대인이나 무슬림 차별을 예외로 하면, 선천적 특징을 이유로 특정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척하고 천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 선천적 특징으로는 대표적으로 피부색 같은 신체적 요소가 거론된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인간 집단을 분류하는 객관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지문을 기준으로 하면, “대부분의 유럽인과 아프리카 흑인과 동아시아인”이 한 집단이고, “몽골인과 호주 원주민이 또 다른 집단”이고, “코이산족(아프리카 남서부에 사는 소수 민족)과 일부 중부 유럽인”이 한 집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전적 형질을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인종 내부의 유전적 변이가 인종들 간의 유전적 차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생물학자도, 유전학자도 신체적·유전적 차이를 기준으로 인간 집단을 일관성 있게 구분하지 못했다.

한편, 인종차별은 흔히 피부색과 관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에서 인종차별의 표적이 된 아일랜드인이나 유럽 등지에서 박해받은 유대인은 피부색을 이유로 천대받은 것이 아니었다.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며 거론되는 인종적 차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의 산물

인종차별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는 없던 현상이다. 물론 일부 집단에 대한 배척과 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 유럽에서는 유대인·무슬림·이교도가 천대받았다. 이는 종교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도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은 없었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의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발전하는 여명기에 생겨났다. 직접적으로는 17~18세기 대서양 노예무역의 출현에서 비롯됐다. 노예무역은 자본가들이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노예로부터 추출한 이윤의 상당 부분은 운하·철도·선박 같은 산업 생산에 투자됐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자본의 시초 축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런 현실과는 모순되게도 미국 독립선언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고,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를 핵심 기치로 내세웠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면 ‘흑인이 다른 인간과 평등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 과정을 두고 에릭 윌리엄스는 《자본주의와 노예 제도》(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4)에서 “흑인 노예제도를 탄생시킨 것은 경제 논리였지, 인종 논리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즉, 인종차별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자 고안된 것이다.

인종차별이 노리는 것

이렇게 생겨나고 굳어진 인종차별은 자본가들에게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분열이라는 이익도 가져다 줬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자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밀”로서, 영국 노동자가 아일랜드 노동자를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여기며 “증오”하고 “자신을 지배 민족의 일원으로” 느끼는 데서 말미암은 양 노동자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지목했다.

마르크스의 이런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특히 각국의 이주노동자와 이주민들이 겪는 천대와 박해와 관련해 그렇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본가들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해 경제적 이득(노동력인구 공급의 유연성, 저임금, 고된 노동)을 얻는 동시에, 이주노동자를 일자리와 복지의 도둑으로 몰고, 임금과 고용 사정 악화의 책임을 전가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유럽에서는 각국 정부들이 부추긴 이주민 배척 정서가 극우와 파시스트들이 성장하는 훌륭한 토양이 돼 왔다.

오늘날 인종차별은 피부색 같은 생물학적 우열보다는, ‘인종 간 우월은 없지만 차이는 있다’거나 ‘문화(또는 문명)의 불평등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무슬림 혐오가 대표적이다.

이런 변화는 오늘날 노예제도나 홀러코스트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인종차별이 광범한 대중에게 배척받아 설 자리가 현저히 줄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생물학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는 종종 결합돼 왔고, 근거가 무엇이든 특정 집단에 대한 천대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반대해야 한다. 또,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편에 서야 한다.

그리고 궁극으로 인종차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뿌리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도 도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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