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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나 학살 2년:
남아공의 새로운 노동운동

8월 16일은 남아공에서 마리카나 학살이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마리카나 학살은 2012년 8월 16일 임금 인상 파업을 벌이던 마리카나 광원들이 경찰의 (고의적) 발포로 34명이나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이 학살은 이른바 ‘흑인의 민주 정부’가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이었다. 또한 커다란 반란이 일어나 개혁된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혹독한 탄압에도 노동자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단호히 파업을 유지해 임금 인상 22퍼센트를 쟁취했다. 이 투쟁과 승리는 다른 부문 노동자들에게도 투쟁할 용기와 영감을 줬다.

아파르트헤이트 해체 이후 최대 변화를 겪고 있는 남아공 2012년 9월 파업에 참가한 남아공 운수 노동자들 ⓒ출처 남아공 운수노조

현재 남아공에서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세적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 시작은 마리카나 광원들의 투쟁과 승리였다.

마리카나 광원 파업의 배경 - 극심한 불평등과 빈곤

1994년, 여러 해에 걸친 위대한 투쟁으로 지독한 인종차별 체제(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 ANC 정부가 들어섰다. 큰 변화였다.

그러나 불평등은 여전했고 보통 흑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95~2005년의 10년 동안 백인 가계의 소득은 40.5퍼센트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흑인 가계의 소득은 오히려 1.8퍼센트 줄었다. 백인들의 소득은 흑인들의 소득보다 12배나 높다. 고용도 불평등하다. 남아공의 전체 실업률은 25퍼센트인데, 흑인의 실업률은 29퍼센트이고 백인의 실업률은 5.9퍼센트이다.

빈곤도 심각하다. 남아공 인구 15퍼센트인 1백90만 명이 판자집에서 산다. 48퍼센트는 한 달 소득이 3백22랜드(약 30만 원)밖에 안 된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은 노동계급을 해방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흑인 중간계급의 일부는 수혜를 입었다. 그들은 ANC의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민영화 대상 기업을 불하받는 등의 방식으로 신흥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대표 사례가 시릴 라마포사다. 그는 1980년대에는 전투적 노조 지도자였다. 그러나 현재는 세계 3위 광산업체 론민의 비상임 이사이자 주요 주주다. 마리카나 학살이 일어난 그 광산의 소유주가 론민이다.

극심한 불평등과 빈곤을 배경으로 남아공에서는 시위가 연평균 7천 건이 일어났다. 2010년 이후에는 파업도 급증했다. 2012년 마리카나 광원들의 파업은 그 일부였다.

호황 산업의 새 세대 노동자들

백금은 자동차의 핵심 부품에 쓰이는 중요한 원료로 2000년대에 수요가 급증했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이 주된 동력이었다. 덕분에 백금 산업은 2000년대에 호황을 누렸고 관련 업체들은 이윤을 막대하게 벌어들였다.

백금 산업은 노동력 인구를 빨아들여 새 노동인구 부분을 형성했다. 2012년 파업을 이끈 노동자들은 2000년 이후에 노동자가 된 젊은이들이었다. 호황 산업에서 일하는 이 젊은 노동자들은 자신감이 높았다.

또한 이 새 세대 노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남아공 정치를 쥐락펴락한 삼각동맹에 대한 충성도가 낮았다. 삼각동맹은 ANC, 남아공 최대 노총인 남아공노동조합연합 코사투, 남아공공산당 SACP의 동맹 관계를 말한다.

2007~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백금 가격이 떨어지자 사용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사용자들은 일자리를 줄이는 등 노동자를 공격했다. 마리카나 광원들은 이에 반발해 투쟁에 나섰다.

단호한 투쟁으로 승리하다

백금 가격이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백금 업체들이 벌어들이는 이윤은 여전히 컸다. 사용자들이 양보할 여지는 있었다.

그럼에도 마리카나 광원들의 승리가 쉽게 얻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광원들은 정부와 사측의 공격에도 맞서야 했지만,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에도 맞서야 했다.

당시 광산업의 다수 노조였던 전국광원노조 NUM의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노동자는 작업에 복귀해야 하고, 법 집행 기관들은 폭력과 살인의 주범들[파업 참가자들을 가리킴]을 강경 단속해야 한다.” 이 말이 있은 직후 학살이 일어났다. 사망자 34명 중 11명이 NUM의 조합원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NUM의 배신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NUM 지도자들은 1994년 이래 구축된 노사정 교섭 구조의 틀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산업별로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교섭하고 정부가 포함되는 구조였다. 상층에서 합의된 것은 해당 산업 전체에 적용됐다.

NUM은 이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 현장조합원들로부터 멀어지고 사용자와 더 가까워졌다. 상층 간부들뿐 아니라 현장과 더 가까운 직장위원도 그랬다. 직장위원들의 임금은 현장조합원 임금의 3배다.

NUM은 기존 교섭 구조의 틀 바깥에서 일어난 마리카나 광원들의 파업을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NUM은 코사투 내 최대 노조였다. 그래서 코사투 지도자들도, 코사투와 동맹 관계에 있는 공산당도 광원들의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배신에는 삼각동맹의 스탈린주의 혁명단계론의 영향도 있었다. 즉, 신식민지인 남아공에서는 민족적 민주주의 혁명을 먼저 완수해야지, 노동자들이 벌써부터 자력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남아공 현실에서는 개혁주의로 나타났고, 흑인 노동계급의 이익을 흑인 중간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효과를 냈다.

광산업의 다수 노조였던 NUM의 승인을 받지 못한 마리카나 광원들의 투쟁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비공인 파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투지를 꺾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단호함은 연대를 이끌어냈다. 론민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에서도 마리카나 광원들을 지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마리카나 광원들은 학살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승리했다.

노동자들을 결속시킨 현장조합원 네트워크

마리카나 광원들의 파업 과정에서 이후 여러 파업들에서도 나타나는 조직이 하나 등장했다. 그것은 ‘위원회’라고 불린 현장조합원 네트워크였다. 위원회는 각 작업장의 파업 대표들이 모인 기구다.

처음에 광원 노동자들은 같은 광산에서 일하면서도 갱도가 다르면 서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위원회를 통해 다른 갱도, 다른 광산, 심지어 다른 업체의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의논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버그 거주자이자 남아공 노동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국제사회주의자 피터 알렉산더는 이 위원회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파업이 영원히 가지는 않으므로 이 조직은 일시적 조직이지만, 파업이 가라앉더라도 이후 투사들의 네트워크로 발전해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아공 노동운동과 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다

마리카나 광원들의 승리에 영감을 받아 다른 광산업의 노동자들뿐 아니라 운수·화물 같은 다른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섰다.

이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22퍼센트에도 만족하지 않고 월급을 1만 2천5백 랜드(약 1백20만 원)로 인상하라는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요구는 곧 ‘생활임금’ 보장 요구로 일반화됐다. 1만 2천5백 랜드는 일부 노동자에게는 현재 임금의 2배에 이르는 금액으로, 공세적인 요구다. 올해 다섯 달 파업해서 승리한 백금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도 이것이었다.

공세적 운동이 이어지며 남아공 노동운동의 구도도 변했다. 광산업의 최대 노조였던 NUM의 조합원이 반토막 났다. 그 대신 마리카나 광원 파업을 지지했던 광원건설노조 AMCU가 급성장해 광산업의 다수 노조가 됐다.

이런 흐름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20년을 득세해 온 ANC-코사투-공산당의 삼각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코사투 내 최대 노조가 된 금속노조 NUMSA가 AN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기로 했다. NUMSA는 조합원이 34만 명인 대형 노조로 영향력이 크다.

한편, 경제자유투사당 EFF라는 좌파 정당도 성장하고 있다. EFF는 창당한 지 1년도 안 되는 신생 정당이다. 그러나 올해 5월 총선에 출마해 1백만 표 넘게 득표하고 국회의원 25명을 확보했다.

이렇듯 마리카나 광원들의 투쟁과 승리는 남아공 정치의 새 국면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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