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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코사투 노총의 금속노조 제명:
ANC와 단절하라는 정당한 요구에 제명으로 답한 노조 관료들

11월 9일 남아공노총 코사투의 특별집행위원회가 산하의 최대 노조인 금속노조를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단순히 코사투 내 권력 쟁투로 말미암은 분열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더 넓은 사회적 맥락이 있다. 남아공 역사를 돌아보며 이 사건의 의미를 살펴본다.

남아공의 자본주의 발전과 아파르트헤이트(인종 격리·차별 체제)

17세기부터 백인 유럽인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정착촌을 건설했고, 흑인을 노예로 부렸다. 그러나 이 지역의 인종차별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발전하면서 근대적 형태로 변모한다.

남아공의 유럽계 백인 지배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에 따라 점차 흑인 노동인구에 의존하게 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독특한 인종차별 체제를 고안해 냈다.

백인 지배자들은 흑인들을 남아공 전체 영토의 13퍼센트도 안 되는 지역에 가둬 놓고는 ‘이주노동자’ 취급했다. 흑인이 남아공 인구의 압도 다수(86퍼센트)를 차지했는데도 말이다. 지배자들은 남아공의 모든 산업 시설이 있는 90퍼센트가량에 이르는 지역을 “백인 지역”으로 규정했다. 흑인이 “백인 지역”에 72시간 이상 머무르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법적으로 흑인과 백인은 지위가 달랐다. 흑인은 투표권을 비롯한 정치적 권리도 없었다. 노동권도 인정되지 않았다.

코사투의 탄생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1960년대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력 수요가 빠르게 늘었고 백인 노동인구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동시에, 생산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이전까지 백인 숙련 노동자들이 했던 직종에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낮았던 흑인들이 진출하게 됐다.

1970년대 초 세계적으로 전후(戰後) 장기 호황이 끝나면서 닥친 경제 위기의 여파 속에 1973년 흑인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흑인 노동자들은 빠르게 조직해 1983년이 되면 노동조합에서 흑인이 백인보다 많아진다.

동시에, 1970년대 아프리카 대륙을 휩쓴 민족 해방 운동의 여파로 남아공에서도 타운쉽(흑인 거주구)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이 성장한다.

1984년 타운쉽을 중심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이 거대하게 벌어지자 노동조합들도 여기에 빨려 들어온다. 흑인 노동자 계급 조직이 동참한 덕분에 1980년대의 타운쉽 투쟁은 과거와 달리 더 지속성이 있었다.

투쟁의 파고 속에 1985년 말 대다수 노동조합을 포괄하는 노총 코사투가 출범한다. 광원노조(NUM)와 나중에 금속노조(NUMSA)로 결집하는 노조들이 주축이었다.

코사투는 강력했고 매우 전투적이었다. 당시 서구에서는 노동운동이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코사투는 노동자 계급이 여전히 사회 변혁의 주체임을 입증하며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러나 코사투는 정치적으로는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에 의존했다. ANC는 흑인 중간계급을 핵심 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스트 좌파 정치단체로, 공산당이 주도했다. ANC는 백인 지배를 타도한 뒤에 남아공이 나아갈 길은 흑인이 기업인으로 참여하는 자본주의라고 봤다. 당시 남아공 노동자 투쟁의 수위를 보건대, 단지 아파르트헤이트뿐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도 도전할 잠재력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남아공공산당은 스탈린주의의 단계혁명론을 따르며 ANC의 노선을 적극 합리화했다.

많은 노동조합 속 좌파 활동가들은 ANC와 공산당의 계급 협력적 민중주의 정치를 비판했지만 ‘노동자주의’(연성 신디컬리즘)의 한계에 갇혀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코사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해 수백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을 벌이는 등 투쟁의 중심 대오였음에도 정치적 주도권은 ANC에게 내줬다.

ANC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이용해, 자신과 협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며 백인 지배자들을 위협했다.

1994년 흑인까지 참여하는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고 ANC가 집권하며 아파르헤이트는 무너졌다. 지배계급은 아파르트헤이트는 포기했지만 ANC와 타협한 덕분에 자본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

ANC-공산당-코사투 삼각동맹과 마리카나 학살

ANC 강령에는 ‘모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실천에서 ANC 정부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적극 수용했고,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했다.

ANC가 집권한 지 20년이나 지났지만 평범한 흑인들의 처지는 기대만큼 나아지지 못했다. 빈민 중 흑인이 백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도 바뀌지 않았다. 흑인들 내의 격차도 커졌다.

흑인 중간계급의 소수는 공기업이나 민영화된 사기업의 경영인이 되는 등의 방식으로 지배계급으로 편입돼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다. 이제 남아공은 전체 소득의 51퍼센트를 상위 10퍼센트가 차지하고,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소득불평등을 0~1 사이의 값으로 수량화 하는 것으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는 0.63으로(2005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코사투는 ANC-공산당과의 삼각동맹에 매어 있었다. 코사투는 1994년 이래 모든 선거에서 ANC에게 막대한 표와 자금을 제공했고, ANC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 등장하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성장한 새 세대 노동자들은 삼각동맹에 대한 충성도가 낮았다. 2007~09년 이후 세계경제 불황 속에서 2010년부터 노동자 파업이 빠르게 증가했다.

2012년 8월 마리카나 지역 백금 광산파업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경찰이 광원들에게 발포해 파업 노동자 34명을 사망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남아공 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흑인 정부가 흑인 노동자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마리카나 학살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ANC 정부에 품었던 환상의 마지막 조각마저 깨뜨렸다.

그런데도 코사투 산하 광원노조는 오히려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며 ANC를 옹호했다. 그래서 수많은 광원들이 코사투 산하 광원노조를 탈퇴해 광원건설노조(AMCU; 코사투에 속하지 않음)에 가입했다.

올해 전 세계 백금가격을 들었다 놓으며 무려 다섯 달 동안 이어진 광원 파업 동안에도 코사투 광원노조 지도부는 한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새 노동자 정당 건설 운동과 코사투 분열 위기

코사투 조합원들 사이에서 더는 ANC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조합원 34만 명으로 남아공 최대 노조인 금속노조가 이런 정서를 가장 적극 대변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2013년 12월 특별 대의원대회를 열어 더는 ANC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새 노동자 정당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fS)이라는 전선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코사투에도 ANC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올해 11월 9일 코사투 특별 중앙집행위원회가 금속노조를 통째로 제명한 것은 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날 금속노조 사무총장은 특별 중앙집행위원회를 박차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코사투 지도부는 ANC-공산당과의 동맹을 사수하기로 했다. 우리가 그 동맹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주장하자 우리를 제명했다.”

코사투의 금속노조 제명은 한국으로 치면 민주노총에서 금속노조가 통째로 제명된 것에 비견된다. 실로 극적인 결정이고 향후 거대한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미 코사투 산하 7개 노조가 공동 성명을 내어 제명 결정을 비판하며 코사투 상층 결정기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의 코사투를 되찾겠다’며 코사투 특별 대의원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다.

코사투의 위기는 단지 상층 노조 지도부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계속된 정치적 급진화가 반영된 것이다.

코사투 분열 때문에 남아공 노동운동이 곤두박질친다는 식의 관측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그동안 코사투 지도부가 현장 조합원들의 염원을 외면하며 ANC-공산당과의 삼각동맹을 더 중시한 것이 문제였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노동자들을 배신한 ANC를 대신할 노동자 정당이 필요하다는 금속노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또한 금속노조를 제명한, 코사투 지도부에 이번 코사투 위기의 모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기여가 기대된다

남아공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포함된 민주좌파전선(DLF)은 2012년 마리카나 투쟁을 포함해 꾸준히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고 있다. 11월 19일에는 금속노조 제명 결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물론 그들은 새 노동자 정당 건설 과정에도 개입하고 있다.

남아공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면 남아공 자본주의와 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코사투 건설 전부터 치열했다. ANC와 공산당은 남아공을 유럽계 백인 식민 정착자들이 아프리카 흑인을 지배하는 ‘내부적 식민지’라고 규정하고 흑인 중간계급과의 동맹을 옹호했다. 당시 좌파는 이런 다계급적 민중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적절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새 노동자 정당 건설 과정에는 이런 정치적 논쟁이 재현될 것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민족 억압뿐 아니라 남아공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려 애쓸 것이다.

또한 새 정당은 선거보다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에 훨씬 더 비중을 둬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남아공 노동운동에는 전통적으로 타운쉽 등 ‘지역사회’와 작업장을 구분하는 경향이 강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 정당이 작업장 쟁점뿐 아니라 실업자,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등의 문제까지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처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들이 개입해야 할 논쟁은 산적해 있다. 지난 20년간 누적된 ANC에 대한 환멸과 세계 자본주의 위기 속에 발휘되는 현장조합원들의 자주성은 코사투 분열 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 냈다. ANC와 결별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자 정당을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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