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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무의 ‘성추행’ 피해를 강조하는 이상한 섹슈얼리티 개념

최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이하 대책위)의 노동자연대 명예훼손 운동에 맞서 노동자연대는 자기방어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정아무의 대리인 이서영 씨(이하 호칭 생략)가 갑자기 엉뚱한 이슈를 제기하며 논쟁에 끼어들었다.

먼저, 원사건의 개요를 밝히는 게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2011년 7월, S대 신입생 정아무는 교지 편집부 수련모임 장소에서 5년 선배인 교지 편집장 이정*이 신입생 A(여)에게 야한 동영상(야동)을 보여 주는 것을 방관했다.

여성을 비하하는 영상을 여성에게 보여 주는 건 분명히 성희롱이다. 그리고 강제성이 있다면 비록 ‘성폭력’은 아닐지라도 위법으로, 단순한 윤리 문제를 넘어선다.

이정*은 그 행위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A는 강제성이 있었다고 주장해, 서로 주장이 엇갈린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정*의 행위에 강제성이 있었다면 정아무의 ‘죄질’도 나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었다 해도 이정*이 A에게 한 성차별적 행동을 정아무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사회주의자로서는 비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이정*이 정아무의 5년 선배이고 교지 제작 과정에서 상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아무가 단순한 대학생이 아니라 사회주의자였으므로 다함께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는 정상 참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서영이 A가 정아무를 ‘성추행’ 했다고 강조한다는 점이다. A가 술에 취해 정아무에게 치근덕거렸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 정확한 통계를 갖고 있진 못하지만,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추행 상담 전화 가운데 남성으로부터 온 것은 극히 드물 것이다. 마돈나의 성적 자기과시 얘기가 한창이던 1995년, 영국 런던의 한 성폭력상담소는 전년도에 접수된 8백 통의 성추행 상담 전화 가운데 딱 3통만이 남성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고 밝혔다.

여성에게 성추행 당한 남성에 관한 보도는 친자본주의 언론 매체의 흥미거리 이슈일 뿐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성추행 당했을 때 그녀가 느끼는 불쾌감과 천대받았다는 느낌의 정도는 남성이 ‘성추행’ 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절대 같을 수 없다. 여성 차별이라는 훨씬 더 큰 사회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주장과 적극성을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은 여성도 남성을 성추행 할 수 있다고 흔히 강조한다. 그러나 이 경우 섹슈얼리티는 더 넓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어떤 것이 된다.

그들은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과장한다. 자기결정권을 빈번히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지 못한 현실의 반영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또한 여성이 성적으로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과장한다. 대다수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실제 현실에선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특히,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여성의 경우엔 더 어렵다.

포스트페미니스트들에게 성해방은 더 평등한 사회를 성취해 사회적 태도와 가치들을 변모케 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고 오히려 여성이 남성처럼 되는 일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은 ‘남성의 세계’ 속에서도 여성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이는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해방이다. 개인주의적 가정들이 근저에 놓여 있다. 개인주의적 관점 때문에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조건 개선을 위해 남녀 노동자 계급이 단결해 집단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점을 경시한다.

여성도 남성을 ‘성추행’ 할 수 있음을 과장하는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은 대개 그 라이프스타일과 일자리가 전문직 여성이거나 전문직 여성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기 쉽다. 노동자 계급 여성으로서는 남성을 성추행 한다는 건 실제의 처지 때문에 평소에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말한 바가 이서영이 여성 해방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 해결책만을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사회의 변화, 그것도 근본적 변화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모순된 두 길을 좇는다는 것은 해방을 위한 일관된 전략이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정아무의 말이나 이서영의 말을 못 믿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아무가 겪은 일을 성추행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은 더 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 말이다. 즉, 사회적으로 대다수 여성이 천대를 받는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것이다. 정아무가 A한테 당했다는 ‘성추행’은 실제로는 A와 정아무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규명돼야 할 특정한 문제다. 둘 사이에는 단순하지 않은 심리적 역학관계가 있었던 듯하지만, 그게 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연히 중간계급 여성이나 그런 처지로 상승하고픈 여성을 비난하려고 여성 천대의 현실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적 분석의 중요성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불평등이 자본주의 사회 구조의 본질적 일부분이고, 따라서 그 불평등과 싸우는 동시에 자본주의 시스템과도 싸워야 하고, 결국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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