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탈산업 사회의 도래”(국역: 아카넷, 2006년)를 예고한 1960년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모했다는 논의가 성행해 왔다.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교수 케빈 두건은 이런 논의를 ‘신(新)자본주의론’이라고 부른다. 논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각종 신자본주의론의 공통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나 세계화나 제도 변화로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고용관계도 질적으로 변했고, 고용이 불안정해졌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현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즉, 이런 주장은 현실의 일면을 묘사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일반화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신자본주의론’의 몇몇 주장들을 실제 현실에 비춰 살펴보겠다.

‘신자본주의’ 관련 이론가들

‘신자본주의론’의 시초는 대니얼 벨이다. 1960년 그는 산업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이제 사회가 지식 중심의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속에서 전문직과 기술직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과학자·수학자·기술관료들이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더 유명한 인물로는 《미래의 충격》(1970년), 《제3의 물결》(1980년) 등의 저자인 앨빈 토플러가 있다. 토플러는 벨보다 훨씬 더 과감했다. 그는 ‘초산업사회’의 도래를 말하며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대를 ‘임시성의 시대’로 규정했다. 1회용 기저귀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듯이 모든 것이 1회용이 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동차나 산업 설비도 대여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지속적 관계가 사라지고 있는데, 이런 추세가 고용관계에도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근속년수가 평균 4년이고, 그에 따라 평생 직장을 7번 바꾼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이렇게 시작된 ‘새 시대’ 논의는 1990년대에 훨씬 더 널리 퍼졌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뤽 볼탕스키와 이브 샤펠로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빌려 자본주의 정신이 세 시대에 걸쳐서 발전했다고 구분한다. 첫째 시대인 19세기 말은 가족 기업 중심의 시대였다. 그때의 자본주의 정신은 가부장적인 기업주 겸 경영자의 경영 마인드를 찬양했다. 둘째 시대인 1930~60년대에는 가족 기업들이 거대 관료 조직으로 대체됐다. 그때의 자본주의 정신은 가족 기업들의 협소한 관점과 족벌 경영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경영을 강조했다. 셋째 시대의 자본주의 정신은 거대 관료 조직이 지니는 경직성과 위계 질서 등에 반감을 보이며 수평적 조직과 경영을 강조했다. 또, 테일러주의·계획·종신고용 등을 비판하며 시장에 의한 외부적 통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볼탕스키와 샤펠로는 왜 시대에 따라 다른 자본주의 정신이 등장하는지 그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지 않았다.

‘신자본주의’ 논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마뉘엘 카스텔, 세넷, 지그문트 바우만, 울리히 벡처럼 한때 마르크스주의자였거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인물들이 이 논의에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 같은 반자본주의자들도 그랬다. 이처럼 ‘신자본주의론’은 좌우파 모두에서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다.

기술 발전이 사회와 노동에 미치는 영향

‘신자본주의론’은 기술 혁신의 영향을 크게 보는데, 그중에서도 정보통신 기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격상시켜 물신화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어의 법칙’이다.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갑절로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을 근거로, 전산 처리 속도의 급속한 발전 덕에 물질적 한계가 극복되고 비물질화된 지식이 경제적 가치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도서관에 있는 책 수만 권을 몇 초면 다운로드 받아 이용할 수 있고, 유비쿼터스 이용으로 다수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이런 주장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이론가가 마뉘엘 카스텔이라는 사회학자이다. 그는 ‘네트워크 사회론’을 주장했다. 정보주의라는 새 발전양식이 등장해, 이에 상응하는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했다는 이론이다.

재택근무

카스텔은 산업 시대에는 경제 성장 추구가 발전 동력이었던 반면, 정보 시대에는 기술 발전 자체가 발전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지식 축적을 위한 지식 축적, 다양한 기술의 융합을 통한 기술 발전이 자체로 동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 축적과 기술 발전 논리 때문에 정보기술을 활용한 시스템과 관계는 모두 네트워크화 논리의 적용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기업들이 외주화나 팀제 근무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실을 너무 과장한다. 정보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더라도 환경미화원이 침대에 누워 휴대용 단말기로 빗자루를 조종해 거리를 청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밖에도 정보통신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물질적’ 노동은 많다. 금융 등 정보통신 기술을 가장 많이 활용하는 부문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기준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4.9퍼센트와 3.9퍼센트밖에 안 된다.

세계화의 신화와 현실

‘신자본주의론’의 또 다른 핵심 근거는 세계화다. 특히 세계화로 말미암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성 증가를 강조한다. 이 주장은 자본이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빠져나가고 선진국에서는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된 지표가 해외직접투자의 흐름이다. 그런데 흔한 가정과 달리, 해외직접투자는 선진국에 집중돼 있다. 1980~2006년 전체 해외직접투자 중 선진국으로 유입된 해외직접투자의 비중은 56퍼센트에서 70퍼센트로 증가했다. 1990~2003년 해외직접투자가 국내 투자(총고정자본 형성)에 기여한 비율은 8퍼센트밖에 안 됐다.

해외투자에는 수직통합형 투자와 수평통합형 투자가 있다. 수직통합형 투자는 생산 과정(원료 생산, 중간재 조립, 완제품 조립, 판매)을 분리해 비용이 가장 저렴한 지역으로 이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직통합형 투자의 목표는 비용 절감이다. 수평통합형 투자는 본국에서의 생산 과정을 똑같이 재현하는 형태의 투자를 말한다. 수평통합형 투자의 목표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오늘날 증가하는 해외투자의 대세는 수평통합형 투자다.

자본의 국제 이동성

‘초국적성 지수’라는 지표도 있다. 초국적성 지수는 한 기업의 전체 자산에서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 전체 매출에서 해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 총고용에서 해외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을 평가해 ‘초국적성’이 얼마나 높은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세계 100대 다국적기업의 초국적성 지수는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50퍼센트를 유지했다. 즉, 다국적기업들의 자산·매출·고용의 절반은 본국에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로 말미암은 일자리 유출 공포가 가장 큰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의 양상도 비슷했다. 미국 다국적기업들의 투자와 고용은 70퍼센트 이상 미국 국내에 집중돼 있다.

이런 실증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느끼는 고용 불안정과 해외 일자리 유출론의 영향력은 크다. 특히 사용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코넬대학교의 케이트 브론펜브레너는 기업 4백여 곳을 연구한 결과, 기업이 손쉽게 생산을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는 인식과 실직에 대한 불안감이 널리 퍼진 것이 미국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다. 연구 대상 기업들의 사용자 중 많은 자들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 할 때 노조를 만들면 폐업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협박에 노동자들이 노조 조직화를 포기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노조가 조직됐을 때 사용자가 실제로 폐업한 경우는 3퍼센트도 안 됐다.

물론 생산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는 현상을 간과하면 안 된다. 한 기업이 여러 나라에 자회사를 두고 그 자회사들 사이에 무역이 이뤄지거나, 한 기업이 일부 업무를 외국 기업에 외주화해 생산이 이뤄지는 경우 등이다. 이런 형태의 생산과 무역이 국제무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형태의 생산이 다국적성을 띠어서 자본의 국제 이동성 논의가 힘을 받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네트워크에 속한 각각의 기업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네트워크에 속한 각각의 기업들은 각 나라의 여러 제도와 사회관계에 깊게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지속성

‘신자본주의’ 논의는 노동시장이 기술이나 제도 변화를 곧바로 반영하는 것처럼 가정한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시장의 성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프레드 블록의 연구가 있다. 그는 시장성이 높은 거래와 낮은 거래를 구분한다. 시장성이 높은 거래는 고전학파 경제학이 가정하는 시장 개념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시장에서 일어나는 거래를 말한다. 복수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참가해 일회성 거래를 하는 경우로, 선물 옵션 거래나 주식 거래 같은 것이 있다. 시장성이 높은 거래에서는 가격이 가장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이와 달리 지속성이 높은 거래는 시장성이 낮은 거래다. 시장성이 낮은 거래에서는 가격보다는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시장성이 낮은 거래의 대표적 사례가 고용 관계다. 즉, 노동시장은 기술이나 제도의 변화가 빠르게 전달되는 메커니즘은 아닌 것이다.

‘신자본주의론’의 확산에는 ‘전환이론’도 한몫했다. 전환이론은 사회 변화를 포스트포드주의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이론이다. 전환이론도 여러 종류가 있어 하나로 묶어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생산 체제가 대규모 시장을 겨냥한 경직된 대량생산 체제에서 틈새시장을 노리는 유연생산 체제(다품종 소량생산)로 전환했다고 보는 공통점이 있다. 전환이론은 생산 체제의 이런 변화에 맞춰 노동시장도 유연화됐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론들은 대체로 노동시장을 효율적인 자기조정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외부적 개입이 없는 한 시장이 최적의 균형을 찾아간다고 가정한다. 국가의 무리한 간섭이나 노조나 독점기업 같은 외부적 요인을 시장의 실패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와 달리, 일부 사회학자들은 시장 자체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지적해 왔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는 칼 폴라니의 ‘착근성’ 개념을 이용해 노동시장이 여러 사회적 네트워크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밝혀 왔다.

노동·자본·국가

노동시장 고유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노엄 촘스키의 ‘표면 구조 대(對) 심층 구조’ 개념이 유용하다. 표면 구조는 사용자와 노동자들의 관계를 규율하는 제도가 국가별로 다양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심층 구조는 노동·자본·국가 사이의 근원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여러 관련 연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숙련 기술 확보·육성 체제, 노동과 자본의 협상 구조 등은 그 나라 산업 발전의 초창기에 생겨나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1918년의 격변기에 형성된 구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노동시장은 기술 변화나 세계화 같은 이런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나름의 내적 논리와 지속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오늘날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력 재생산 부문에 종사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 보통 포스트포드주의 관련 이론들은 이런 현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력 재생산 부문에는 교육과 의료 등이 있다. 최근 이런 부문에서 고용이 급증했다. 그리고 노동력 재생산 부문의 확산이 오히려 노동시장 변화에서 더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 확대는 보건의료 부문의 확장과 관련성이 높다. 그래서 노동력 재생산 부문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또한, 노동력 공급과 재생산에서 국가가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점도 봐야 한다. 영국이 대표적 사례다. 16세기 영국 국가는 인클로저(울타리 치기)를 통해 농민을 토지에서 몰아내 임금노동자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구빈법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제했다. 19세기에는 고강도·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하락하고 건강 상태가 나빠지며 전쟁 수행에도 차질이 빚어지자, 학교 급식과 연금을 도입하는 등 복지를 제공했다. 결국 자본은 노동이 필요하고, 그래서 노동력 재생산 부문은 확대돼 왔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핵심은 바뀌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변혁하지 않고는, 그리하여 생산관계와 그것을 포함하는 사회관계 전체를 끊임없이 변혁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못한다. … 생산을 끊임없이 변혁하기, 사회적 조건을 모두 끊임없이 교란하기, 불안정과 동요를 지속시키기가 부르주아지의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해 준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한 이 말처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한다. ‘신자본주의론’이 과장하는 현실을 냉정히 살펴보면, 자본이 노동에 의존한다는 기본 전제조건은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자본주의론’이 함축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불안정성 증가 앞에 무력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용자와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새로운 부문에서 나타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에서 그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전문통역가 천경록이 Kevin Doogan, New Capitalism? The Transformation of Work, Polity 2009를 한 워크숍에서 요약·발표한 것을 바탕으로 썼다.

녹취 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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