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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ㆍ주택 은행 합병은 DJ의 실패작"

2000년 12월 22일 국민·주택은행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정부는 어떻게든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어야 했다. 그래서 국민은행장 김상훈과 주택은행장 김정태가 서둘러 합병 발표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날 발표된 양해 각서는 아주 초보적인 합병 원칙조차 확정하지 못했다. 양해 각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법인 이름이나 합병 비율은 빠진 채 "두 은행이 합병 합의서에 서명했다. 2001년 6월까지 새 은행 설립을 마치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두 행장이 약속했던 6월까지는 이제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합병은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까?

일간지의 국민·주택은행 합병 관련 기사의 제목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갈등·신경전·걸림돌·논란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합병 본계약을 맺기도 전에 합병은행장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한국경제〉 3월 17일치.)

합병 비율을 둘러싼 두 은행 경영진들 사이의 줄다리기도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자기 은행의 주식 가치를 서로 높게 측정하려는 식의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국민은행측은 주식 가치로만 합병 비율을 결정할 경우 1.2(국민) : 1로, 주택은행측은 1.8 : 1로 합병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다.

뉴욕 증시 상장은 합병의 예기치 않은 복병으로 등장했다. 합병을 하려면 국민은행 주식이 뉴욕 주식 시장에 상장돼야 한다. 그럴려면 "2년치 대차대조표와 3년치 손익 계산서를 미국 회계 기준에 맞춰 재작성해야" 한다(〈머니 투데이〉 3월 8일치). 한 금융 관계자조차 통상 6개월에서 9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국민은행이 6월까지 마치기는 힘들 것"이라고 실토했다.

주택은행이 독점·관리하는 국민주택기금 부실 문제도 국민은행과의 합병 걸림돌로 등장했다. 국민은행은 주택은행측에 합병 이전에 국민주택기금 운용자인 건설교통부로부터 부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받든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부실을 떨어내라고 채근하고 있다.

금융가에서는 4월 말로 예정돼 있는 합병 승인 주주총회의 연기설이 나돌고 있다.

실적 올리기

국민은행장 김상훈은 1월 2일 신년사에서 올해 대규모 당기 순이익을 내 합병 과정에서 우월적 위치를 지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수익성과 건전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1조 원 이상의 당기순이익을 창출해 내겠다"

이 때문에 국민은행 노동자들은 '실적'을 올리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물론 해마다 이런 강조 기간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강조 기간은 노동자들에게 여느 때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연체 관리를 맡고 있는 한 노동자는 '연체 대출금 건전화'를 위해 밀린 연체를 내라는 전화를 자그마치 매일 1백 통 이상 해야 한다. 또 다른 노동자는 카드 발급을 위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은행을 찾는 손님들에게 카드를 만들라는 권유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에게 할당된 양은 월 신규 가입 40개다.

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강조 기간을 보이코트하자는(일종의 태업) 한 조합원의 글도 실려 있다.

"지금 한참 발광을 하듯이 강조 기간들을 걸어 놨는데 무엇을 위한 강조 기간인가? 합병이 끝나는 6월이 되면 뼈빠지게 일해서 이익을 창출해 놓은 우리는 잘려 나갈 것이다. 어떤 놈들 주둥이에 넣으라고 우리더러 일하라는 것인가?"

"국은인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국민은행을 국내 최우량은행으로 만들기 위해 야근하면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게 무엇인가요? 김상훈이 올 순익 목표를 1조 5백억 원으로 했다는데 김상훈이 혼자 일하라고 하고 우리는 앞으로 일하지 말고 연체, 수신 강조 기간, 카드 등 김상훈이 내려 보내는 모든 강조 기간을 보이코트 합시다."

과다한 실적 올리기 압력은 노동자들에게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줄 뿐 아니라 합병 반대에 대한 관심과 투쟁 의지를 떨어뜨린다. 실제로 한 노동자는 "요즘 실적 올리기에 바빠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며 "일산에서의 기억조차 까마득하다."고 했다. 은행은 강조 기간을 통해서 노동력을 쥐어 짜 합병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한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꺾으려 한다.

힘빼기

1월 30일 국민은행 대의원 대회 때 지도부는 비대위를 구성하라는 조합원들의 열망을 무시했다. 그러자 대구·경북지역 대의원들은 사퇴했고, 조합원들의 지도부에 대한 실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안건 하나 상정하기 위해 왜 대의원들은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렵게 울부짖어야 했던가? 현 집행부는 왜,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필사적으로 안건에 대한 논의조차 막으려고 노력해야만 하는가?"

2월 중순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압력에 밀려 비대위를 구성했다. 비대위는 노조 상근 간부들과 각 지역의 지회장 1명, 실무위원 1명을 포함하여 53명으로 구성됐다. 애초 조합원들은 투쟁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비대위에 포함되기를 바랬다. 대의원 대회에서 새로운 비대위 위원들을 선출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반면 지도부는 비대위 구성을 형식적으로 처리했다. 한 조합원은 국민은행 노조 게시판에 비대위에 대해 "운영위원 명단을 보세요. 구색 맞추기 위해 몇 명 위원들을 넣었을 뿐 선거 참모 일색이더군요. 뻔히 보입니다."라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