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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열린우리당에 의존해서는 우익을 패배시킬 수 없다

노무현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한 달 후,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던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은 결국 우익들이 쟁점을 주도하는 상황으로 전환되고 있다.

애초 열린우리당의 대안은 국가보안법의 본질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법의 외피만 바꾼 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소 조항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위장 폐지’였다.

실제 통일연대 민경우 사무처장은 지난 9월 15일 “국가보안법이 형법으로 보완되거나 대체 입법을 만든다고 해도 ‘그 법’으로도 처벌 가능하[다]”며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안이 실제 내용에서는 한나라당과 차이가 없자, 심지어 공조 가능성이 대두됐다. 지난 9월 중순 한나라당 박근혜가 국가보안법의 명칭을 바꿀 수 있다고 하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천정배가 “개혁적 입장”이라고 맞장구치며 “[폐지를] 밀어붙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라며 한나라당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맞장구

박근혜는 자신들이 “수구 꼴통”으로 취급당하는 사회 저변의 도도한 급진화 분위기 때문에, 이들은 개정 제스처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렸던 것뿐이다.

그러나 유약한 중도 정당이 우익들에 타협적 태도를 보이자, 우익들은 기세 등등하게 본색을 드러냈다. 천정배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장외투쟁[뿐]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해서 막을 것”이라며 열린우리당의 껍데기뿐인 국가보안법 폐지안에 더욱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게다가 경제 상황의 악화에 따른 양극화가 “흉흉해진 추석 민심”으로 표현되면서, 한나라당과 같은 우익들에게 더 자심감을 갖게 만들었다.

반면 추석 직후 열린우리당은 더욱 몸사리기에 급급했다. 당의장 이부영은 “국보법은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후퇴했고, 당 내에서도 “지도부가 나서서 국보법이나 과거사 논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열린우리당의 유약한 태도 때문에 국가보안법 쟁점에서 우익들이 주도권을 잡게 됐다. 우익들은 10월 4일 국보법 폐지 반대 시위에 10만 명이나 동원해 자신들의 주도권을 굳히려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에 의존해서는 우익들을 패배시킬 수 없다.

상당수 진보 진영 단체들이 9월 5일 노무현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이후 한껏 고무된 듯 했다. 한동안 금방이라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것 같은 기대감에 휩싸였다. “국가보안법 그 최후의 순간을 위한 투쟁 … 필요한 것은 ‘추석 전에 끝장을 내자’는 결심과 실천이다.”(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혼란

이런 기대감이 때론 운동을 일시적으로 부양할 수 있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면 혼란과 사기 저하가 찾아 온다.

사실 이런 기대는 국가보안법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관련돼 있다. 대다수 좌파 민족주의 단체들은 국가보안법을 주되게 “냉전 악법”, “반통일악법”으로 여긴다. 그래서 “반통일세력”인 “한나라당을 소수당으로 전락시킨 현 상황은 기본적으로 국보철 투쟁에 매우 유리한 조건”(한총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핵심은 정권과 체제에 저항하는 피억압 대중의 운동과 조직을 겨냥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 지배계급이 급속한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계급과 피억압 집단의 투쟁을 탄압하고, 다수 대중을 정치적으로 수동화시키는 데에 아주 요긴하게 쓰인 통치 필수품이었다.

물론 1987년 항쟁 이후 꾸준히 성장해 온 피억압 대중의 운동 때문에 권위주의 체제가 이완됐다. 그러나 경제의 불안정과 위기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의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김영삼·김대중·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모두 저항 운동을 탄압하는 데 국가보안법을 활용해 왔다. 한총련이야말로 이런 자유주의 정권들의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따라서 노무현에게 국가보안법의 ‘완전 철폐’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 잡으려는 격이다. 노무현이 한사코 ‘형법 보완’을 전제로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형법이라는 “칼집”에 잠시 넣어뒀다가 정권의 위기가 심화하면 언제든 다시 꺼내 휘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대다수 좌파 민족주의 단체들처럼 “1차적 투쟁 대상”을 수구냉전 세력으로 정하고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은 위험한 태도다.

면죄부

상당수 진보 진영 단체들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의존하는 동안, 우익들은 자신들의 세를 규합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때리기에 열을 올렸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익들이 쟁점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따라서 근시안적으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의존하기보다는 ‘완전 철폐’의 여론을 차근차근 형성시켜, 우익과 노무현 모두에 맞서는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