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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반전 운동의 성과

어떤 사람들은 국내외 반전 운동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한국군 파병도 막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시안적 단견이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몇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벌어진 후에도 미국 정부는 즉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김인식(〈민중의소리〉, 9월 30일)은 이렇게 지적한다. “[지금]미국은 1968년 2월 베트남 떼뜨[구정] 공세 때와 비슷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당시 대다수 미국 지배계급 분파는 패배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지만 철수의 묘안이 없었다. 미국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나서야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러시아와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참전 정부를 무너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1990∼91년 걸프(페르시아만), 1992∼93년 소말리아, 2001년 아프가니스탄 등 탈냉전기 9차례 한국군 파병 가운데 유독 이라크 전쟁만이 중요한 국가적 이슈가 된 이유는 그것에 대한 반대 행동이 대중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 반대는 민주노동당이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파병 저지를 채택했을 만큼 크게 부각됐다. 민주노동당은 올해 말 파병연장동의안 국회 통과에도 반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역사상 최초로 한국에서 대중적 반전 운동이 건설됐다. 반전 운동은 지난해 2·15 때 4천 명에서 올해 김선일 씨 피랍정국 때 1만 5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고, 몇 차례 파병안 통과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지역 수준에서 벌어진 거리 집회와 시위도 있었다.

운동을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

이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의 연계”, “이라크 해방과 자유, 민주화” 등 미국 정부의 거짓말을 믿는 한국인은 드물다. 노무현 정부도 이라크 전쟁 자체가 정당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변명성 하소연을 할 뿐이다. 정부는 출국하는 자이툰 부대도 몰래 빼돌려야 했다.

반전 운동은 또한 노무현을 심각한 정치 위기에 빠뜨렸다. 총선 직후 최고 수준으로 회복한 노무현의 인기는 김선일 씨 정국인 6월 하순경 다시 최하로 떨어졌고, 아직도 그 수준을 약간 웃돌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반전 운동에 부딪혀 아스나르, 고이즈미, 블레어, 부시 자신이 인기 하락을 겪거나 심지어 실각했다.

반전 운동이 전쟁과 파병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가령 김광수 평등연대 정책위원, 〈민중의소리〉, 10월 1일)이 온당하지 못한 것은 노동자·민중 운동이 반민주악법의 전형인 국가보안법을 아직까지 폐지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그 동안 노동자·민중 운동은 김광수 씨는 물론 주요 지도자들이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수감되는 것을 대부분 막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보안법 반대 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물론 아니다. 6∼9월에 거대한 대중 투쟁이 일어난 1987년 이래 운동이 성장해 오며 사람들의 의식을 높인 결과, 여전히 평양에 스탈린주의 정권이 존재하는데도 국민의 대다수가 보안법의 폐지나 개정을 원하고 있다.

무릇 운동의 성패는 일회적으로 보지 말고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을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운동이 내놓은 주요 요구를 성취했느냐 여부를 따지기 전에 먼저 운동이 조직을 건설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느냐 여부로 평가해야 함을 뜻한다.

공동전선은 행동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지, 강령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공격하기를 회피한 사람들은 만일 노무현을 공격하면 노무현 공격할 태세가 돼 있지 않은 단체들과 개인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주장했다. “전선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병하는 당사자가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인데도 이 엄연한 사실을 비켜가려 하는 것이 오히려 전선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파병반대국민행동 공동대표단과 운영위원들 가운데는 일부 집회참가자들이 노무현 비난이나 퇴진 구호 외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동전선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이해(理解)에 근거해 공동전선이 행동뿐 아니라 “강령 통일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퇴진을 외치는 것은 문제이고 탈북자 입국을 반대하는 듯한 연설(최규엽)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는 이중 잣대의 발로이다. 차라리 노무현 퇴진을 외치는 것이 김선일 정국에서 대중 정서에 부합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 반대”나 “한미동맹 반대”는 집회 참가자 모두가 동의할 구호인가?

“미국 반대”는 모호한 말이다. “미국”이라 말할 때 그것은 국제적 국가체계 속에서 한 행위자 구실을 하는 미국 국가를 뜻하기도 하고 미국민 모두를 집합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후자의 의미 때문에 “미국 반대”라는 구호에 불편함을 느낄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면, “미국 반대”라는 구호는 운동의 기반을 제한시키는 구실을 한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한미동맹을 파기하지 않고도 파병을 철회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스페인은 철군을 해도 미국과 동맹 관계를 종식시키지 않았다. 폴란드도 철군을 결정했지만 미국과 동맹 관계를 끝내지 않는다.

요점은 이렇다. 반전 운동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점령과 한국군 파병에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든 운동에 연루시키려 애써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가 노무현 퇴진을 주장하든, “미국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든, 한미동맹 파기를 주장하든, 노동계급의 참가가 중요함을 주장하든 선전·선동의 자유는 주어져야 한다.

주요 반전 운동들에서 배운다

반전 운동이 가장 성공적으로 일어난 나라들(영국·이탈리아·스페인)은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운동 참가가 두드러진 곳이었다. 노조의 참가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스페인에서 좀더 두드러졌다.

2002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럽사회포럼이 끝난 뒤 1백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해 행진했는데, 이 가운데 10만 명 이상이 이탈리아노동조합연맹의 조합원들이었다. 2월 15일 국제 공동 행동의 날에는 로마에만 4∼5백만 명이 운집했는데, 다수가 노조원들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철도 노동자들은 군수 물자 수송을 거부하는 파업도 벌였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반전 운동 연합체는 노조가 시위 자금을 대주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반전 운동 연합체처럼 부채에 허덕일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스페인에서는 반전 연합체 소속 연사가 노조 집회나 위원회 토론회에 초대돼 강연했다.

다른 한편, 각급 노조 조직은 각급 반전 연합체 조직과 그 행사에 대표자들을 파견했다.

이 나라들의 반전 운동 연합체는 한국의 파병반대국민행동처럼 단지 ‘상층’ 수준에서만 조직되지 않고, 기층 수준에서도 조직됐다. 가령 영국의 ‘전쟁저지연합’은 지역 조직과 지지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있었고 자체의 간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나라들 사이의 차이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우파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반전 운동이 당원 수 10만 명인 재건공산당(리폰다찌오네)을 포함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가톨릭 교회 같은 기관들도 영향을 받았다.

포퓰리즘적 적자

영국은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으므로 사정이 달랐다. 영국 반전 운동 내 조직 좌파는 2만 5천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1만 명, 공산당 1천여 명, 노동당 좌파 의원과 좌파 노조 지도자들의 지지자들(대부분 조직돼 있지 않다시피 한)을 합치면 이 정도 규모이다.

영국의 경우, 조직자 규모와 피동원자 규모의 격차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막상 전쟁이 시작돼 국수주의적 선전이 몰아칠 때 영국의 반전 운동 규모는 다른 두 나라보다 조금 더 많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반전 운동에 비해 영국 반전 운동이 누리지 못한 사회민주주의적 지지를 “사회민주주의적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반전 운동이 한나라당 정부 하에서라면 받을 수 있으나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받지 못하고 있는 지지를 우리는 포퓰리즘적 적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수도 서울의 경우 이 적자의 규모는 노무현 탄핵에 반대해 시내 한복판으로 쏟아져나온 적이 있으나(25만 명) 파병 반대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와 비슷할 것이다.

한편, 주요 반전 운동 국가 간에 정권의 성격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얄궂은 결과가 빚어졌다. 베를루스코니와 아스나르가 우파 지도자인 반면에 블레어는 사회민주주주의 지도자였으므로, 반전 운동에 의해 블레어가 더 불안정을 겪었다. 자신의 기반으로부터의 반발(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것을 포함해)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경우 비록 사회민주주의 정권은 아니지만, 피억압자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에 일부 지지 기반이 있는 포퓰리즘적 정권이다. 억압받는 대중의 적잖은 부분의 지지를 받는 자본가 정권인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도 파병 문제 때문에 큰 불안정을 겪었다.

반전 여론과 반전 행동 사이의 격차

한국 반전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80퍼센트가 넘는 반전 여론(그리고 절반이 넘는 파병 반대 여론)과 최대 1만 5천 명이었던 실제 반전 행동 사이의 격차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포퓰리즘적 적자가 있다. 이것은 피억압자 운동의 일부가 노무현 정권을 지지함을 뜻한다. 이에 따라 피억압자들 가운데 적잖은 부분(아마도 이라크전에는 반대하지만 파병에는 찬성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일 것이다)이 ‘국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미국의 파병 요청(강요일지라도)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요인으로 한국에서 대중적 반전 운동이 초유의 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록 세계화 때문에 각국 운동이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음에도, 아무런 전통이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다시피 하는 운동은 미숙함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겨우 1만 명 넘는 규모의 집회를 치르고도 실제로 파병을 막을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조직된 좌파에서 민족주의 전통이 우세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을 처음 건설하려 했을 때도 우리는 “한국에서 무슨 반전 운동인가? 더구나 한반도도 아닌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하는 중견 운동가들의 관성적이고 굼뜬 반응에 부딪혀야 했다.

국가 문제

반전 운동 지도부 자체의 문제점들도 있다. 첫째, 파병반대국민행동 지도부는 노무현에 대한 정면 공격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가지 이유는 민족주의적 가정들에 근거한 ‘미국 책임’론이다. 미국책임론은 사실상 한국책임면제론이었다. 미국이 압도적으로 문제이고, 한국 쪽에서는 “을사오적”처럼 “민족을 거슬러” 미국을 공공연하게 편드는 “매국노”들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책임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 정부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비록 미군에 견주면 하위 제휴자이지만 어쨌든 한국군도 공동 점령군이다.

파병반대국민행동 지도부가 노무현에 대한 공격을 회피한 다른 이유는 시민단체들이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믿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이것은 그들이 “행정부 관료를 비판하고 청와대를 두둔하는 입장”(김종찬, 《한국의 탈레반》, 43쪽)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시민단체들이 노무현 정권의 외곽 기구 구실을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와 초좌익이 공유하는 이런 견해와 달리 시민단체들은 노무현 정부와 애증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NGO는 비정부기구이지, 정부기구가 아니다.

또한 시민단체들은 제국주의의 대리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매우 동요해서 신뢰하기 힘들지만 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국가 중립성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믿음은 그들의 국회 로비 중시에서도 드러난다. 여야 정당대표 면담, 파병 반대 의원 간담회, 국회의원 서명운동이 크게 중시됐다. 시민단체들은 파병을 반대한다는 자본주의 정치인들과 밀월관계에 있었다.

동력 문제

반전 운동 지도부의 둘째 문제점은 시민단체들이 대중(많은 사람들) 투쟁의 중요성을 경시한다는 것이다. 파병반대국민행동 정책사업단이 내놓은 계획에는 대중 투쟁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흔했다. 기자회견, 조사단, 시국선언, 국민청원 등 선전 중심이었다.

‘대중’ 가운데 특히 조직 노동계급에 대한 불신이 두드러졌다. 시민단체는 계급 정치를 배격하므로 “각계각층”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이는 “시민사회” 이론이 파편화를 사실상 찬양·고무하고 연대를 경시하는 것과도 관계 있다.

좌파민족주의도 조직 노동계급에 주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정도가 시민단체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또한 좌파 민족주의는 대중 투쟁을 중시한다.

조직 노동계급의 반전 운동 참가가 중요하다 해서 김광수 평등연대 정책위원처럼 그런 일 없이는 반전 운동의 승리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페인과 폴란드의 철군에서 조직 노동계급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위원의 주장과 달리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서도 조직 노동계급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흑인 공민권 운동과 반란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전쟁 말기에는, 상당수가 흑인인 전선의 사병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에 의해 죽은 장교 수가 저항하는 베트남인들에 의해 죽은 장교 수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김위원처럼 노동계급의 요구를 반전 공동 행동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공동전선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이다. 공동전선은 혁명가들이 개량주의자들과 함께 협력해 활동하는 가운데 개량주의적 지도의 부적절함이 대중에게 입증될 때까지 인내해야 함을 뜻한다.

김광수 씨처럼 노조원들의 현재 의식도 고려하지 않은 채 시도 때도 없이 “총파업”을 주장해서 총파업이 일어난다면 정말 좋겠다.

실제로는, 현장조합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실로 참을성 있게 선전·선동을 수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반전 투쟁과 조직을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가장 단순한 요구들로써 가장 광범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광범한 운동은 조직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자극하고 참가를 고무할 것이다. 마치 김선일 정국의 격앙됐던 1만 5천 명 시위가 항공기 조종사들과 화물운송 노동자들을 비롯해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일부 운동에 끌어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대중적 입증의 중요성

그렇기는커녕 김광수 씨는 “봉건 반동 회교 지도자들”이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 지도자들을 다 “봉건 반동”으로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 된다. 무슬림 가운데 원리주의자들은 매우 소수이다. 그리스도교 경전에 국가에 충성하라는 구절과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이 있어도 홍근수 목사나 반전평화기독인연대·한기연 같은 기독교인들이 있듯이, 이슬람 경전이나 교리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는 무슬림들도 적지 않다.

김광수 씨에게는 심지어 노조 지도자들과 평화주의적 학자·언론인 들이 연설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아예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원들만으로 이뤄진 반전 운동을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레닌은 평화주의를 비판했지만, 또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대중의 정서는 전쟁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인식과 항의와 분노의 단초를 보여 준다. 그런 정서를 활용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이다.”(〈사회주의와 전쟁〉, 두레, 52쪽)

대중의 소박한 평화주의 정서를 활용하려면 정치적 인지도가 높은 평화주의적 지식인을 연단에 세우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레닌은 또한 ‘순수한’ 사회주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회 혁명이 식민지와 유럽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 없이, 온갖 편견을 가진 쁘띠부르주아 일부의 혁명적 분출 없이, 지주·교회·왕정의 억압과 민족 억압 등등에 대항하는 정치의식 없는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 이런 생각은 모두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편이 한 장소에 죽 늘어서서 ‘우리는 사회주의에 찬성한다’ 하고 말하고 다른 편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에 찬성한다’ 하고 말하는 것이 사회 혁명일 것이다! … ‘순수한’ 사회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살아 생전에 결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혁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말로만 혁명을 떠드는 사람이다.”

초좌익적 경향의 약점

반전 운동 일각에서 나타나는 초(超: 도가 지나친)좌익주의로 말미암아 종파주의의 위험이 존재한다.

초좌익적 경향은 노무현 비판이나 심지어 퇴진 요구를 반전 운동의 전제조건으로 강요하려 한다. 노무현을 반대하지 않는 단체나 개인은 아예 반전 운동에서 배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초좌익적 경향의 첫째 유형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결합시킬 것을 강제하려 애쓰는 것이다. 〈노힘〉은 그렇지 않은 반전 단일 쟁점 중심 전선은 의미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초좌익적 경향의 둘째 유형은 아나키즘처럼 “행동의 선전”을 강요하려 애쓰는 것이다. 집회 후 실력에 의한 경찰봉쇄선 돌파나 적어도 돌파 시도가 가장 중요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중과부적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대중의 동참이 아니라 소수의 영웅적 의지가 중요하다.

이런 유형은 마르크스가 변화의 ‘산파’로 보았던 집단성을 경시하고 물질적 조건을 무시한다. 그리고 변화의 과정을 상황과 거의 관계 없이 신념에 찬 행동으로 이해한다.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은 운동의 타락 경향을 상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 단식농성과 파병부대 앞 시위에서 보았듯이 좌파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매우 헌신적이고 투쟁적이다. 급진 좌파가 전투성이나 의지로 파병반대국민행동 내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능가할지는 몰라도 민중단체 지도자들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단식이나 소수파 완력행사가 참을성 있는 대중 운동 구축을 대체하는 경우, 누가 영웅적으로 그런 방법을 채택하든 엘리트주의의 위험을 내포한다. 사실, 좌파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두 방법을 결합시키며 김선일 정국의 격앙된 파병 반대 정서를 무마했다.

인내의 중요성

초좌익적 경향의 셋째 유형은 파병반대국민행동으로부터 ‘독자적인’ 연합체를 건설하려 하는 경우이다. ‘다함께’와 ‘노동자의힘’과 ‘사회진보연대’는 여전히 파병반대국민행동 안에 남아 있지만, 다른 급진 좌파들은 파병반대국민행동과 별개의 반전운동체를 조직하려 노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노힘’의 경우, ‘국민행동’에 남아 있는 것과 다른 반전 조직을 건설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결국, 다른 급진 좌파들을 끌어들여 파병반대국민행동 안에서 좌측 경향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실세 없는 ‘독립’ 반전 조직을 건설하려 헛되이 애쓸 것인가?

이는 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량주의의 근원은 단지 지도자들의 잘못된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국민주의(포퓰리즘)는 외세에 의해 분단돼 전쟁까지 치르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외세와 독재와 한줌밖에 안 되는 족벌 대기업집단(재벌) 아래서 국민 대다수가 억압받아 온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다.

지난 봄 수도 중심가에 25만 명의 청장년을 불러모을 수 있는 시민단체들, 선출된 민주노총 지도부, 제3당인 민주노동당 등이 파병반대국민행동에 있는 한 우리 급진 좌파의 과제는 선전주의적으로 공문구만 남발하며 뺄셈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런 단체들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지도자로 여기는 대중과 접촉점을 잃지 않기 위해 참을성 있게 국민행동 안에서 조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