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세상을 알았나요? 애 키우고 맞벌이하고 내 가정만 챙기면 될 줄 알았지. 나라에 해경 있고 경찰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살았지.”

“TV 자막이 떴어요. ‘전원 구조.’ 그때 부모들은 박수를 치면서 ‘그럼, 그럼, 우리나라가 어떤 나란데, 배 만들어서 수출하는 나란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랬어요. 그 배가 일본에서 가져 온 낡은 배인지도 모르고.”

“나는 이런 나라인 줄 정말 몰랐거든요. … 배를 가라앉혀 놓고는 애들을 건져왔대요. 이 더러운 나라, 이 더러운 나라…”

《금요일엔 돌아오렴》(416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에 실린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 유가족의 피눈물 나는 말들이다. 4·16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소속 필자 열두 명은 유가족들을 심층 인터뷰해 참사 이후 유가족들의 활동과 심경을 담았다.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씻기 힘든 분노가 있다. 기업들의 책임과 부패 유착은 물론이고 정부의 구조 실패, 거짓 언론플레이, 진상 규명 방해가 점차 밝혀지면서 이 내려놓을 수 없는 분노는 수백만 대중에게 확산돼 왔다.

세월호 참사 특별법 제정을 찬성하는 서명에 6백만여 명이 참여한 것은 단순히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권당이 일년 동안 흑색선전을 펼쳤는데도 올해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투쟁 때 여전히 여론 다수가 유가족의 요구를 지지했다. 올해는 더 많은 10~20대의 학생, 청년들이 거리 시위에 나와 폴리스라인에 맞섰다. ‘세월호 세대’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이런 연대의 한복판에는 예방적인 안전 조처에서는 물론이고 구조에서조차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노동계급 사람들 사이의 본능적 연대의식이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보면 작가들이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닐 텐데도 평범한 노동계급의 애환과 비애가 가득하다.

맞벌이를 하느라 (희생된) 애들을 평소에 잘 챙겨주지 못한 일, 갖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사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런데도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밝게 살았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수학여행 가기 전에 신발 하나 사달라는 거 사줄 걸. 가방만 하나 사줬더니 ‘엄마, 가방이 너무 비싸네? 신발은 갔다 와서 살게’ 하는 아들한테 ‘그래, 새 신발 신고 돌아다니면 발 아플 거야’ 그러면서 신발도 안 사주고 보낸 이 어리석고 답답한 엄마.”

못 믿을 기성 언론

달리 가진 것이 없어 자식이 유일한 ‘재산’이고 삶의 목적인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현재의 일상만이 아니라 미래의 일상까지 파괴된 사건이었다.

“출근하기가 싫어요. 회사에 왜 가는지를 모르겠어요. 다영이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엄마도 회사를 다녔던 것이고, 나도 애들 위해서 노력했던 건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목표의식이 사라졌어요.”

참사 당일, 언론은 ‘전원구조’ 오보만 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순전한 엉터리로 대응하는데도 언론은 헬기 수십 대, 함정 수백 대, 잠수인력 수십 명이 동시에 투입돼 있다고 버젓이 보도했다. 언론의 오보에 팽목항 현장에 있던 유가족들이 격분한 것은 당연하다.

“[당일] 저녁 7시쯤에 몇몇 부모들이 돈을 걷어서 어선을 빌렸어요. … 애 아빠가 다녀와서는 ‘구조를 전혀 안 해. 보트 같은 것만 주변을 돌고 있어.’”

“배에는 앙카라는 게 있어요. 그걸로 유리창을 깨면 그 방 아이들은 다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 (참사 당일 구조에 나섰던)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나보다 성이 더 나갖고 ‘살릴 수 있었는데 안 살렸다’고 … 선원들 중에는 학생들이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얼굴을 유리에 대고 숨을 거둬가는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사의 구조적 원인 살펴보기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물음은 “왜?”로 압축된다. ‘왜 이런 사고가 나게 됐지? 왜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지? 왜 정부는 진상 규명을 방해하지?’ 이것들이 응축돼서 ‘이게 나라야?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가야?’라고 표현됐다. 이중 소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 즉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의구심을 확대하고 있다.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생각의 길),《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미지북스),《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박상은, 사회운동) 등은 ‘왜 이런 참사가 벌어졌는가’에 대해 답변해 보려는 진지한 시도다. 세 권 모두 읽어볼 만한 책이다.

《민변의 기록》은 민변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를 꾸려 유가족을 지원하면서 파악한 것들을 나름의 틀로 종합 분석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이 참사의 핵심으로 지적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규제 완화와 정부의 무능이다. 안전 규제를 완화하고, 구조 같은 중요한 공공 업무까지 민영화하는 등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공공성을 해체해 온 것이 참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또한 검찰이 사고 원인이라고 밝힌 ‘급변침’이 실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지적은 침몰의 직접적 원인도 진상 규명 대상이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세월호 인양이 실종자 수색뿐 아니라 진상 규명에도 중요한 이유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 과정과 기록들을 재구성해 참사 진실에 다가가려 한 수작이다. 작가기록단 소속이기도 한 오준호 작가는 재판 기록으로 참사의 총체적 진실을 다 알 수는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다.

“위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행위만 기소하고 재판부는 검사의 기소가 적법한지 여부만 따지기 때문에 … 지난 이십 년간 대한민국의 모든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명분으로 … 사고가 일어날 전반적 조건을 숙성시켜 온 이 모든 행위들은 세월호 재판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그의 결론은 “세월호 사고를 낳은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긴 바로 그 국가, 그 사회 시스템이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이 시스템 내 구성원들의 무책임과 비겁함은 “평범한 개인들도 자신의 행동으로 구조적 부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사회진보연대 박상은 활동가가 쓴 《대형사고는 왜 반복되는가》도 기업의 이윤 추구와 그것을 보장하려는 국가의 조처들이 문제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장점은 제목처럼 풍부한 국내, 해외의 대형사고 사례를 통해 대형 참사가 자본주의의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 주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이 책들이 내놓은 대안들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요구로 내놓은 안전 규제 강화, 민영화 중단과 원상 회복,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기업살인법 등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이미 국가가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이런저런 조처들을 실행한 것이 문제가 된 터다. 왜 지금껏 국가는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헌신해 왔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안전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도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세월호 참사가 특정 정권만의 문제일까? 세월호 참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려는 학자들의 논문집인 《팽목항에 부는 바람》(인문학협동조합, 현실문화)에서 김동춘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해경이 사기업인 언딘에게 구조를 위탁한 것은 정부의 기능 축소와 민간 위탁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의 결과이므로 구조적으로 이 사고는 국가 시스템 전반과 연관되어 있다. 해군의 통영함이 출항하지 못한 것은 해군 비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해경의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도 오래된 관료사회의 문제점이 누적된 것이므로 단순히 박근혜 정권 차원을 떠난 국가 차원의 문제다. 그렇게 본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대형 참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이런 분석을 “한국 시스템의 한 결과”로 스스로 제한한다. 이는 한국 지배계급의 통치 특성을 “전쟁 정치”로 규정하는 그의 분석이 자본주의 국가 일반과 한국 국가를 예리하게 구분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절반의(또는 반의반의) 인민주권’, ‘안보 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의 연속성’은 최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편(자본주의 국가 일반)과 특수(한국 국가)는 구분되지만 별개의 것이 아니다. 특수는 보편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찰의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한울아카데미)에는 대형사고가 반복되는 원인을 다음처럼 분석하는 구절이 있다.

“시스템을 닫힌 체계로 인식하게 되면 기존의 시스템을 그냥 둔 상태에서 … 시스템을 지탱하는 암묵적 가정은 의문시하지 않고 시스템의 목표나 가치 그리고 전략을 그대로 둔 채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을 추가하게 된다.”

이 책을 쓴 연구자들은 사회의 우선순위를 공공성에 둬야 한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이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정에 도전하진 않는다. 앞의 책들처럼 이들이 지적하는 요인들, 즉 기업의 이윤 추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자본주의의 생래적 특징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연구자들의 지적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더 물어야 한다. 왜 기업들의 이윤 추구가 이 사회와 국가운영의 우선순위가 됐는지 말이다. 사회의 우선순위는 정치, 민주주의, 계급(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다. 따라서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앞서 다룬 온건한 두 책이 회피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특히,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필요하다. 세상을 통찰하려면 현미경도 필요하지만 망원경도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둘 모두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는 경제 위기 시대에 한국 자본주의를 위기와 저항 모두에서 구출하려고 등장한 강성 우익 정부다.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적’처럼 여기는 정부가 이윤 우선주의를 문제 삼는 유가족을 적대시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한 유가족이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기 아들 시신이 나왔다는 방송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체육관 인파에 섞여서 몰래 감시하던 사복경찰이 방송을 듣고 당신 아들 나왔다고 알려주기 전까지!(《금요일엔 돌아오렴》) 참사 당일 진도 현장에 배치된 해경의 5분의 4가 유가족 감시에 배치됐다.

국가의 첫째 임무는 합법으로 폭력을 독점하고서 자본가 계급을 대표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은 기업의 이윤 추구가 성공해 자본주의 경제가 성공하는 것이 그것에 기초한 국가가 부강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예방하고 체제 내로 포섭하려고 통치의 절차상 정당성을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다수 대중을 분열시키고 현혹시키는 일들을 매일매일 꾸며 낸다. 사람들은 오직 저항할 때나 격변적 경험 속에서 이를 문득 깨닫게 된다.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가족들을 몰아붙일지는 정말 몰랐어요. 우리는 국민도 아닌 것 같아요. 대통령이 국회에 연설하러 왔을 때는 거의 경악 수준이었어요. 엄마들이 새벽같이 올라가서 대통령 눈길 한번 사로잡으려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더라고. 그러면서 웃으면서 지나가더라고. 그게 사람인지요. … 대통령이 그러니 그 밑에 사람들은 어떨까 싶고.” (《금요일엔 돌아오렴》)

유가족을 외면한 박근혜의 눈길과, 국가를 믿고 구조만 기다리던 무고한 목숨들을 가차없이 외면한 이 사회 시스템은 결코 별개가 아니다.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의 뿌리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본주의에서 착취받는 노동으로 이윤을 만들어 내는 노동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주도적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