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6월 28일로 예정된 자긍심 행진을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반(反)동성애를 부르짖는 우익들은 지난해에는 행진을 가로막더니 올해는 아예 행진 신고부터 막으려 했다. 우익들은 자긍심 행진 주최 측(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행진 신고가 예상되는 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하고, 서울 시내 주요 광장과 도로에 동시 다발로 집회 신고를 냈다. 

경찰은 우익들과 협의해 6월 28일자 행진 신고 절차를 임의로 바꾸고, 나중엔 우익과 행진 경로가 겹친다며 자긍심 행진 금지 통고를 내렸다. 이에 자긍심 행진 주최 측과 시민사회 단체들은 행진 금지 통고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우익들은 “메르스가 창궐하는데 동성애 축제가 웬말이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한 양식 있는 기독교 신문은 ‘대형교회들의 주일 예배에 사람이 더 많이 운집하는데 자긍심 행진만 비난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꼬집었다. 

최근 동성애 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는 우익 부류는 “동성애자는 혐오가 아닌 구원의 대상”이라며 “동성애는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탈동성애 운동’을 이끄는 이요나 목사는 자신도 예전에 동성애자였다는 걸 내세운다. 그는 ‘동성애자를 도와 준다’면서 자긍심 행진에 대당하는 우익들의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탈동성애 운동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간주하는 반동적 주장을 궤변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탈동성애 운동은 체제가 강요하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속에 살아가는 동성애자들(대체로 신앙이 있는)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족 등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지 못 해 절망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개인적 해결 방법을 강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동성애 운동은 이런 동성애자들에게 ‘당신들이 고통받는 건 당신 때문이다. 그러니 동성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소수자 차별의 뿌리는 자본주의 가족제도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체제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은 노동력 재생산에 드는 어마어마한 돈을 절약할 수 있다. 자본가 계급에게 성소수자들은 이성애 가족을 위협하는 세력들이고, 고정된 성 역할을 흔드는 자들이다. 그래서 19세기 초에 법률, 과학, 의학을 통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체계적 박해가 시작됐고, 가족제도가 재건됐다. 오늘날 자본주의 가족이 많이 약화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일과 가정의 양립’ 운운하면서 여전히 가족의 기치를 강조한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투쟁의 압력에 밀려 성소수자들에게 양보할 때조차 이성애 중심의 가족제도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하려 한다. 

속죄양 삼기

유별나게 성소수자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기독교 우익 단체들이 있다. 이를 성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같은 구절을 놓고도 기독교 내부에서 해석의 논쟁이 있거니와 성소수자 문제에 좀더 유화적이거나 혹은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개신교 단체들도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섬돌향린교회 등).

특별히 동성애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우익들이 생겨나는 토양을 봐야 한다.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에게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려 한다. 이를 위해 지배계급은 보수적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화·설파한다. 그럴 때, 특정 유형의 차별(인종차별, 동성애 차별 등)에 대해 더 유난스럽게 달려드는 부류들이 생길 수 있다.

미국에서는 경제가 침체하던 1970년대 말에 낙태와 동성애자들의 시민권 인정을 반대하는 극성스러운 기독교 우익 단체(‘도덕적 다수’)가 상당히 성장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인 제리 폴웰은 ‘텔레토비’의 ‘보라돌이’가 동성애자를 의미한다며 아이들에게 해롭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는 동성애에 적대적인 자들을 고위직에 앉히는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분위기를 부추겨 왔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인 황우여는 ‘한국교계 교과서 동성애·동성혼 특별대책위’를 이끌면서 교과서에 동성애에 관한 기초적인 언급조차 포함되지 않도록 하려던 자다. 박근혜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동성애 차별적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최이우 목사를 내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탈동성애 인권 포럼’을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우익들의 공격에 새정치민주연합이 후퇴한 것도 우익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인권헌장을 폐기하며 후퇴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서울시는 자긍심 행진 주최 측이 7차례나 신청을 한 후에야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했다. 또, 최근 서울시는 전시회 공모전에서 당선한 기획이 청소년 성소수자 관련 내용이란 이유로 전시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기도 했다.

개혁 조처들

이처럼 한국은 아직 법적 평등까지도 갈 길이 멀다. 여전히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 6항이 존재하고,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혼인 신고가 단칼에 반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보면 성소수자의 인권은 점점 신장되는 것 같다. 룩셈부르크 총리가 동성결혼을 하고, 보수적인 가톨릭이 강세인 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이 국민투표로 합법화됐다. 이번 달 말이면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모든 주의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개혁 조처들과 우호적인 분위기가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스톤월 항쟁이래 벌어진 수십 년간의 투쟁의 성과라는 점을 먼저 봐야 한다. 이렇게 성소수자가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평범한 성소수자들의 자신감도 높아질 수 있고, 자신감을 가지고 더 많은 개혁을 위해 투쟁에 나설 수 있다.

이 점은 개혁의 진정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오바마는 지금 성소수자 인권의 전도사처럼 행동하지만, 2006년 부시 정부가 연방 헌법을 개정해 동성결혼을 금지하려 하자, “개인적으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해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지만 결혼은 주 법률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었다. 오바마가 공식적으로 동성결혼 지지를 발표하는 데까지, 평등을 위한 투쟁들이 만들어 낸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가 중요했다. 

이번 한국의 자긍심 행진에 참가하는 대사관 17곳 나라들에서도 결코 지배계급은 자동으로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 나라들의 성소수자들은 자국의 억압적 조처들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성소수자들에게 개혁을 내줄 때조차 계속 이성애와 차별을 두려 한다. 동성 부부에겐 이성 부부에게 보장되는 권리를 박탈한다든지, 결혼은 돼도 입양은 안 된다든지 등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이등 시민으로 두려는 것이다. 이런 차별 조처들은 동성애가 어쨌건 이성애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게 해 차별적 생각을 재생산한다.

얼마 전 발표한 유엔 인권 보고서를 보면 적어도 76개 나라에서 성소수자 처벌법이 존재하고, 매년 수백 건의 성소수자 혐오 살인이 벌어진다. 심지어 성소수자의 법적 평등을 쟁취한 곳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성소수자 차별의 뿌리가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소수자 운동은 여전히 급진성을 가지고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 차별의 뿌리인 자본주의 체제를 겨냥하는 것이 더불어 필요하다. 

올해 자긍심 행진은 스톤월 항쟁일(6월 28일)과 같은 날에 진행된다. 스톤월 항쟁 이후로 만들어진 급진적 성소수자 단체 동성애자해방전선은 “병든 것은 내가 아니라 나보고 병들었다고 하는 사회다” 하고 외쳤다. 6월 28일은 병든 이 사회에 저항하는 날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