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밤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고강도 긴축안을 내놓았고 그 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대중이 61퍼센트라는 압도적 반대로 거부했던 그 긴축안과 다를 게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국민투표에서 찬성 운동을 벌였던 신민당?사회당?포타미와 논의해 마련한 것이었다. 불과 닷새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 이틀 동안 유럽연합 지배자들과 그리스 정부의 협상이 이어졌고, 7월 13일 유로존 정상회의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 내용은 국민투표에서 부결시켰던 것보다 더 나쁘다. 〈조선일보〉는 합의 결과를 보며 희희낙락했다. “그리스와 채권국들이 가까스로 합의한 타결안 내용의 결론을 요약하면 그리스의 완패다. 앞으로 재정주권을 박탈당한 채 ‘경제 신탁통치’를 당하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처지다.”

시리자 정부는 부채 일부 탕감은 얻지도 못한 채 고강도 긴축을 먼저 시행해야 한다. 당장 7월 15일까지 입법해야 한다. 그나마도 협상 개시를 위한 조건일 뿐이므로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구제금융을 받게 되더라도 문제다. 그리스 정부는 또 빚을 지게 되고, 경제가 회복될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 그 빚을 갚으려면 긴축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구제금융은 그리스 노동자와 서민이 아니라 유럽 은행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를 보며 그리스 노동자들이 느낄 허탈함과 배신감과 분노는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노동자들이 이 합의를 그냥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그리스 노동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사회 전체와 함께 스스로를 좌경화시켰다. 이 계급투쟁이라는 요소는 지금까지 그리스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 다시 한 번 확인된 유럽연합의 비민주성과 악독함

지난 3주 동안 유럽연합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지독한 기구인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시리자 정부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시리자 정부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술 관료’로 이뤄진 새 정부로 교체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지지 않았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 대다수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정책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마치 신(神)이라도 되는 양 사회 위에 군림하며 제멋대로 구는 자들에게는 국민적 의견 청취조차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그리스 우파들과 손잡고 가용 수단을 모두 동원해 그리스 대중을 협박했다. 반대가 승리하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전력 공급이 끊기고, 생필품 수입이 차단되고, … 더는 급여를 받을 수 없게 되고, 전력과 대중교통 등 기초 공공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유럽의회 의장 마르틴 슐츠가 한 말이다.

그리스의 기업주들은 찬성 집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며 직원들을 협박했다. 버스를 대절하면서까지 찬성 집회를 조직하려 애썼다.

그리스 노동자들은 그리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이며 꿋꿋하게 협박에 맞섰다. 많은 노동자들이 연대 행동으로 화답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힘들게 사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주민들도 그리스 노동자들을 응원했다. “반대”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 “오히”(OXI)는 국제 공용어가 됐다.

그리스 대중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대표로 긴축을 거부했다. 당연히 그리스 대중은 반대를 선택했을 때 따라올 혹독한 보복과 어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당사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절감했을 것이다. 꽤 많은 노동자들이 “심장은 반대표를 던지라고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 대중은 ‘국제 정치’를 모르는 어리광이 아니었다.

그리스 대중의 단호한 긴축 거부는 지난 몇 년 동안 경제 위기와 혹독한 긴축을 겪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노동자의 3분의 1인 1백5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평균 임금이 3분의 1 삭감되고, 연금이 반 토막 나고, 각종 세금이 8배나 오르는 상황을 거치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스 대중의 긴축 거부는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지배자들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세를 거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크게 한 방 먹었다. 이 타격으로 유럽연합 지배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를 어떻게 대할지를 두고 의견 불일치가 생겼다. “그리스에 대한 압박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는 말이 유럽 지배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리스 부채를 일부 탕감해 줘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여기에는 각국 지배자들의 경제적?·정치적?·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른 계산도 작용했다. 그러나 그리스 대중의 단호한 거부 의사 표시가 없었다면, 각국 지배자들이 각자 자기 이익을 셈해야 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그리스 정부에 긴축을 강요하는 데서는 차이가 없었다. 누구도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는, ‘담배 형사’와 ‘주먹 형사’의 차이였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그리스 정부가 “만족스러운 개혁안”을 제출해야 구제금융 제공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며, 그 시한은 7월 12일이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7월 13일 합의에서도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그리스 정부가 “신뢰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투표 같은 돌출 행동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 대중의 의견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2. 시리자 ‘전략’의 완전한 파산

시리자 정부는 국민투표에서 표현된 그리스 대중의 의지에 기대 유럽연합 지배자들에 맞서 싸울 수도 있었다. 각국 지배자들의 셈법이 조금씩 어긋나는 상황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자 정부는 백기 투항해 버렸다.

이는 근본적으로 시리자가 채택한 전략의 약점 때문이다. 시리자는 집권하면 유럽연합 지배자들을 설득해 빚 부담을 덜고 긴축을 중단시키겠다고 했다. 긴축이 그리스 경제의 회복을 방해하고 그리스 정부의 부채 상환 능력을 떨어뜨려, 결국 유로존과 유럽연합에 피해가 될 것이라는 점을 설득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를 ‘인수’해 협상과 개혁 입법으로 사회를 바꾸겠다는 사상과 실천을 두고 개혁주의라고 한다. 물론 시리자가 사회당 같은 주류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와 긴축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좌파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국민투표 실시 같은 예기치 못한 행동을 벌이기도 한 것이다. 시리자에 대한 분석을 단순화하면 전술 제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시리자의 개혁주의 ‘전략’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했듯이,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시 말해, 민영화, 규제 완화, 임금?·연금 삭감으로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게 떠넘길 ‘권리’와, 빚 부담과 긴축을 완화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호할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은 대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은 처음부터 단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현금 공급을 끊었다. 7월 초부터 현금 인출이 제한되고 일부 자본 통제가 실시된 근본 원인이다.

이런 옹고집을 무너뜨리려면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필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단은 노동계급의 파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자인 시리자 정부에게는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을 확대?심화시키는 것보다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연명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시리자 정부는 2차 구제금융의 마지막 분할금을 받기 위해 후퇴를 거듭했다. 빚은 6월분까지 다 갚았고 긴축은 계속 실시했으나, 결국 구제금융 분할금을 받지도 못했다. 2월 20일의 후퇴로 “시간을 벌었다”던 시리자 정부가 지난 네 달 동안 한 일이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을 대하는 시리자의 태도는 개혁주의 전략의 약점을 증폭시켰다. 시리자는 그리스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입장이 매우 단호하다. 이런 입장 때문에 시리자 정부는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는 독일의 협박에 취약했다.

시리자의 이런 태도는 우선 유럽연합과 유로존에 대한 착각 때문이다. 즉, 유럽연합에 모종의 진보적 성격이 있거나 적어도 유럽연합으로 뭉친 것이 국민국가로 나뉜 것보다는 국제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많은 좌파가 이런 착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처음부터 유럽 자본가들의 경쟁력 상승을 위한 기구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렇다. 또, 유럽연합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세력을 확장하고 전쟁을 벌이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가입 조건도 신자유주의적이다. 유로존은 그 이데올로기적 토대 자체가 신자유주의이다.

유럽연합은 전혀 국제주의적이지도 않다. 올해 4월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침몰해 8백 명이 몰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비극은 중동과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의 유입을 차단하려는 유럽연합의 공동 정책에서 비롯했다.

국제주의의 범위가 유럽으로 한정될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국제주의를 유럽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사실 확장된 지역주의일 뿐이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을 대하는 시리자의 태도에는 그리스 지배계급에 대한 타협의 의미도 있다. 그리스 지배계급은 유럽연합과 유로존 가입을 통해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미치려 애써 왔다. 예를 들어,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한 뒤 그리스 은행과 기업들은 발칸 반도로 대거 진출해 민영화되는 공기업 등 각종 자산을 헐값에 쓸어 모았다. 그리스 지배계급은 이 지위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전략적 약점들 때문에 시리자 정부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스스로 고강도 긴축을 시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3. 시리자 내 좌파의 무능

한편, 이번에 시리자가 유럽연합 지배자들에게 굴복하는 과정에서 시리자 내 좌파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7월 10일 밤에 제출된 긴축안에 대해 시리자 내 좌파 의견그룹 ‘레프트 플랫폼’ 소속 의원들은 한 목소리로 반대해야 했다. 그러나 ‘레프트 플랫폼’ 의원 중 국회 부의장을 포함한 15명은 찬성표를 던졌고, ‘레프트 플랫폼’의 좌장 격인 라파자니스 에너지부 장관을 포함한 7명은 기권했고, 4명은 결석했고, 단 2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날 반대표는 모두 32표가 나왔는데, 시리자 ‘레프트 플랫폼’ 소속 의원 2명, 공산당 소속 의원 13명 전원, 황금새벽당 소속 의원 17명 전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긴축안에 대한 반대표에서 나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 셈이었다.

이렇게 ‘레프트 플랫폼’ 의원들이 평소의 주장과 다르게 행동한 것은 결정적으로 좌파 정부의 존속 그 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레프트 플랫폼’ 의원들이 모두 정부 정책을 반대하거나 탈당하면 시리자 주도의 연립정부는 국회의원 수가 과반이 안 돼 시리자 정부는 소수 정부가 되거나 실각할 수 있다. 그래서 ‘레프트 플랫폼’ 의원과 활동가들은 안타르시아와 비슷하게 디폴트(채무불이행)와 유로존 탈퇴를 주장하면서도 결정적인 때에는 정부에 부담을 주는 행동을 꺼렸다.

시리자 좌파는 이제 더 큰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당장에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 구제금융안 항의 시위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7월 15일 국회 표결에서는 어떻게 투표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또다시 7월 10일과 같은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이참에 시리자에서 탈당해 안타르시아와 함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좌파들이 열광한 범좌파 정당 모델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물론 혁명적 좌파가 (좌파) 개혁주의와 관계 맺는 방법은 다양하고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는 입당도 타당한 정책일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그 정당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정당을 혁명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봐서도 안 된다.

그리고 개혁주의 정당이나 정부가 굴복하고 배신할 때 운동이 함께 고꾸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혁명적 좌파가 독립적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4.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그리스 국회에서 긴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높다. 신민당과 사회당 등이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기관지 〈노동자 연대〉 편집자인 파노스 가르가나스가 지적했듯이, 불리한 처지이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관련 기사: [영국 ‘맑시즘2015’ 현장 취재: 쿠벨라키스 VS 캘리니코스] 시리자가 실패한 지금, 혁명가들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7월 9일부터 좌파들의 주도로 시리자 정부의 굴복과 새 구제금융안에 항의하는 시위가 계속 조직되고 있다. 한 활동가에 따르면, 시리자 청년 조직과 안타르시아가 꽤나 협력해서 거리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또, 7월 15일에는 공공부문노총(ADEDY)의 공식 호소로 하루 총파업이 벌어진다. 시리자 정부 등장 후 첫 총파업이다.

이런 투쟁들이 가하는 압력으로 시리자 의원들 사이 균열이 생겨 긴축안이 부결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물론 통과 가능성이 더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 투쟁들은 이후 투쟁을 위한 긴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좀 더 길게 보면,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드러난 그리스 노동자들의 투지와 자신감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긴축을 받아들인 정부가 단 한 번도 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는 것도 봐야 한다.

물론 투쟁의 확대?심화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려는 독립적인 혁명적 좌파의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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