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연금 강화와 노후 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구’(이하 ‘사회적 기구’)가 50일이 지나도록 구성원을 정하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새정치연합에서도 서두르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거에서의 유불리를 계산하면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듯하다. 〈노동자 연대〉 151호에서 이처럼 주류 정당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연금 강화 논의가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사회적 기구’ 참여가 공적 연금 개선을 위한 수단이 될까?)

그럼에도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등 공적 연금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유일한 노후 수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관심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운동 내의 대안들을 살펴보고 각각의 의의와 약점을 통해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지 제시하려 한다.

공적 연금 문제를 진보적 방향에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단체들은 주요 운동하는 NGO와 노동조합, 그리고 개혁주의 정당 등 주로 개혁주의 단체들이다. 이에 비해 급진 좌파들은 노동자연대 등 일부 단체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최근에야 공적 연금 쟁점을 둘러싼 각종 논의와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아직까지는 전체 노동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액수도 용돈 수준인데다가 장차 받게 될 사람도 주로 정규직 노동자들이라는 점이 이유로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조직 노동자들이 대부분 의무적으로 공적 연금 제도에 가입돼 있고 1997년 IMF 사태 이래 연금제도가 신자유주의적 복지 개악의 주된 타깃이 돼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태도는 좌파의 정치적 약점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이런 태도에 대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개혁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방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래서 공적 연금을 둘러싼 운동 내 논의는 상당히 온건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소득대체율이다. 소득대체율은 퇴직 전 월소득 대비 연금 액수를 뜻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당시 제시된 것처럼 현재 주요 개혁주의 지식인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50퍼센트다. 2007년 국민연금 개악으로 당시 60퍼센트였던 소득대체율이 40퍼센트로 대폭 삭감됐는데, 10퍼센트는 기초연금으로 대신하고 국민연금도 50퍼센트로 되돌려 개악 이전 수준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50퍼센트라는 목표치는 40년 동안 보험료를 냈을 때 받을 수 있는 ’명목’ 소득대체율일 뿐이라는 점에서 더 높아져야 한다. 가입 기간을 고려하면 실질 소득대체율은 여전히 25퍼센트를 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로 소득의 10퍼센트를 기초연금으로 받는다고 해도 월평균 소득이 3백만 원인 노동자가 퇴직 뒤에는 고작 1백5만 원을 받는다. 이는 국민연금연구원이 제시한 노후 최저생활비(부부 기준 1백60만 원)에도 모자란 액수다. OECD가 각국 정부에 권고한 소득대체율 70~80퍼센트에 비해서도 매우 낮다.

누군가는 비현실적 요구라고 손사래 칠지 모르겠지만, 모름지기 요구는 대중의 필요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연금 개선 요구가 실질적인 운동으로 발전하려면 대중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가치가 있는 수준은 돼야 한다. 현재 연금 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주로 ‘용돈 연금’이라 부를 만큼 터무니없이 낮은 소득대체율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 낮은 요구는 개인적 해결책들(사적 연금, 저축 등)에 비해 특별히 나은 것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에 소속된 NGO들과 민주노총 등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퍼센트를 요구한다. 정의당도 같은 목표치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연금행동’의 50퍼센트 요구를 지지하면서도 그전에 독자적으로 채택한 소득대체율 45퍼센트 목표를 폐기하지는 않고 있다. 이 목표는 상향돼야 한다.

노동당과 노동자연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2007년 개악 이전 수준인 60퍼센트로 복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60세에서 65세로 늦추는 개악이 이뤄졌는데 이를 정년 퇴직 시기인 60세로 맞춰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단체는 노동자연대가 거의 유일한 것 같다.

사각지대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최소한 10년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임신, 출산, 미취업, 실직 등으로 소득이 없어 10년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전체 가입 대상자의 절반이나 된다. 저임금 노동자들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의 경우 소득의 9퍼센트나 되는 보험료 부담 때문에 아예 가입을 회피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신, 출산으로 인한 휴직 기간이나 군복무 기간 등을 가입기간으로 인정해 주는 각종 ‘크레딧 제도’와 저소득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지원하는 ‘두루누리 사업’ 등을 대폭 확대 시행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연금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이런 요구를 제시해 왔다. 다만 이 정도 조처로는 사각지대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사각지대를 획기적으로 줄이려면 노동자들과 저소득층의 보험료 부담을 대폭 덜어 주거나 아예 면제해 줘야 한다. 그리고 기업주·부자들의 보험료 부담을 늘려 연금 지급에 충분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양질의 공공부문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등 노동자들의 소득 자체를 늘리는 것도 사각지대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초연금을 대폭 확대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사실 기초연금의 도입 취지 자체가 보험료 납부와 관계없이 정부가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대 20만 원밖에 안 되는 현행 기초연금 제도는 생계비 지원은커녕 노인들을 열악한 일자리로 내모는 효과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

기초연금

현재 기초연금은 전체 노인의 70퍼센트에게만 20만 원가량 지급하고 그것도 국민연금을 받을 경우 최대 절반을 삭감한다. 심지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게는 기초연금 수령액이 소득 인정액에 포함돼 사실상 “줬다 뺏는” 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기존에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소득에 연동되던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바꾸면서 물가에 연동되도록 바꿨다. 물가 인상률이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소득 인상률보다 낮기 때문에 기초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진다.

그래서 주요 개혁주의 단체들은 기초연금을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소득(A값)의 10퍼센트에 맞춰 모든 노인에게 지급할 것을 요구해 왔다. 반면 노동당은 20퍼센트로, 좌파노동자회는 30만 원으로(약 15퍼센트)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은 국민연금보다 기초연금을 인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험료 납부 의무가 없고 사각지대도 생기지 않으니 장점이 큰 것은 사실이다. 세금은 사회보험에 비해 누진율이 높아 재분배 효과도 더 크다.

다만, 오 운영위원장은 기초연금 먼저, 그 다음에는 사각지대 해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소득층의 소득대체율 인상이라는 순서를 제시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층에 대한 지원을 우선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인다. 그러나 ‘재원’이 부족하다는 정부와 기업주들의 관점을 일부 받아들인 결과이기도 한 듯하다. 재원이 충분하다면 굳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기초연금 확대 중 어느 하나를 우선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원은 충분하다. 당장 5백조 원 가까이 쌓여 있는 국민연금 기금을 소득대체율 인상에 사용할 수도 있고, 기업주·부자들이 쌓아 둔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면 현재 10조 원밖에 안 되는 기초연금 재정도 대폭 늘릴 수 있다.

한편, 오 운영위원장은 증세를 통해 기초연금 확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기업주·부자 뿐만 아니라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도 증세 대상이다. 그는 복지 확대를 위해 기업주·부자들뿐 아니라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단지 재원 문제만은 아니다. 때로는 후세대 부담을 들어 현세대의 ‘책임 의식’을 지적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연대’를 위해서라고 한다.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공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그가 제시하는 저소득층 우선론이나 보편증세론은 근본에서 계급을 해체하고 사람들을 오로지 소득 수준에 따라 분류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본가들에게 지나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도,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 된다. 실제로 그는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량이 면세자라는 사실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물론 기업주 등 자본가들과 부자들이 세금을 더 적게 내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부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로잡겠다고 “나도 더 낼 테니, 너도 더 내라” 하는 식으로 몰계급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실현 가능성도 낮을 뿐 아니라 진정한 ‘정의’와도 거리가 멀다.

보험료

문제는 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이런 관점을 공유하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정의당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해 기업부담금 조정, 보험료 인상 등의 방안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당은 조세 불평등을 비판하면서도 복지 확대를 위한 보편 증세를 주장해 왔다.

참여연대도 보험료 인상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노동자들의 보험료 인상을 일관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김연명 교수 등 참여연대의 복지 정책에 관여한 많은 학자들은 보험료 인상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녹색당은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니 아예 소득대체율을 인상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녹색당은 복지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그 장점을 부각하려다 보니 다소 종파적인 입장을 내놓은 듯하다.

안타깝게도 좌파 내에서도 보험료 인상에 대한 모호함이 존재한다. 노동당은 “고소득층과 기업이 더 많이 부담하는 것을 전제로 보험료 조정”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좌파노동자회도 “고소득자에게 높은 연금보험료를 부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소득자’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포함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사회진보연대는 “[보험료] 상한선 상향 등 형평성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노동자 보험료 인상 문제에 대한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은 기업주들의 부담을 늘리고 그래도 부족하면 정부가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험료 인상은 반대하는데, 다만 증세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노동자연대만이 거의 유일하게 노동자 보험료 인상에 반대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물론 운동 단체들의 보험료 인상론은 노동자들에게만 부담을 떠넘기는 정부의 태도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기업주와 부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해 온 노동운동의 전통적 요구에서 후퇴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2000년대 초 민주노동당은 부유세와 군비 축소 등을 요구하고 보험료 사용자 전액 부담을 요구하며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같은 구호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런 후퇴는 한편에서는 지배계급의 양보를 강제할 힘이 없다는 비관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계급 개념을 사실상 해체시킨 데서 생긴 혼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 내 소득 격차와 계급 간 차이를 단지 양적인 차이로만 여기다 보니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하는 자본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급과 소득격차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의 소득 격차가 크더라도 그것을 계급 간 격차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첫째, 노동자들의 소득은 대부분 생계비로 지출된다. 일부 저축을 하더라도 근본에서 임금에 의존하는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소득에 고율의 세금과 보험료를 부과하면 사실상 임금을 삭감하는 효과가 난다. 반면 자본가들의 소득은 그 자신이 아무리 사치스러울지라도 대부분 저축되거나 투자된다. 따라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도 자본가의 ‘인간다운 삶’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세금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은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그래서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인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도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누진율을 대폭 높이고 면세점을 높여 노동자들의 부담은 지금보다 줄이고 자본가들의 부담은 늘려야 한다.(〈노동자 연대〉 142호에 실린 ‘연말정산과 노동자 증세 논란 - 누가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가?’를 보시오.)

둘째,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의 소득과 노동자들의 소득에는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본가들은 오로지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만 부를 늘릴 수 있다. 직접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소득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 자신이 생산한 부의 일부만을 가져갈 뿐이다.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다른 노동자들의 몫을 가져갔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원 김유선 소장이 노동소득분배율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 주듯이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들의 몫을 가져간 것은 자본가들이다.

따라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자본가들이 부담해야 한다. “노동계급에게 더 큰 케이크 조각을 얻는 것은 전술 문제이지 (정의) 이론 문제가 아니다. 어느 것 하나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바로 빵집 전체의 소유와 운영이 노동계급의 정의 이론이 될 것이다.”(최일붕, ‘정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 존 롤즈 《정의론》 읽기’)

이처럼 계급을 착취에서 비롯하는 객관적인 관계로 이해한다면 자본가들에 맞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계급 개념을 일부 받아들인다.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이전에 존재한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의 소유 정도나 각종 기회에서 편차가 아주 큰 사람들의 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뛰어나고 노력을 해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자들’에게 고용되는 게 삶의 목표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는 까닭이다.

금수저

이 점 때문에 막스 베버 등 자유주의적 사회학자들은 모호한 계급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핵심은 계급을 객관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이나 소득 수준 등 사회적 ‘지위’에 따른 계급 분류는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이런 계급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나 유용할 뿐이다. 이들은 계급 분열이 사라졌다거나 더는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따위를 설파한다.

셋째,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처지가 나은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런 계급 내 격차를 줄이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계급 간 분배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것을 강제할 힘이 필요하다. 계급이 착취에서 비롯한 객관적 관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본가 계급을 설득해 개혁을 베풀도록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는 개혁주의 정당이 집권한 나라들에서조차 역사적으로 거듭 입증된 사실이기도 하다. 당장 그리스 사례를 보라.

심지어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떠밀려 개혁을 내놓을 때조차 자본가들과 국가는 장기간에 걸쳐 조세와 사회보험 제도 등을 통 해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겨 왔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려면 공통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단결해 집단적 힘을 발휘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 내 격차를 계급 간 격차와 마찬가지로 여기는 관점으로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킬 수는 있어도 단결시키기는 어렵다.

마지막으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하는 객관적 구실(이윤 창출) 때문에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의 지배를 끝장낼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라고 봤다. 이 점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당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근본에서 다른 점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에게 복지제도 등 사회 개혁은 그 자체로도 필요하지만,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계급의식과 조직을 성장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들이 복지 개혁 논쟁과 운동에 관여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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