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 정세는 단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좌파 활동가들에게 몹시 중요한 화두이다. 다음은 홍콩 좌파 단체 레프트21의 회원이자 홍콩직공회연맹(HKCTU)의 간사였던 빈센트 성(宋治德)의 글이다. 홍콩 레프트21은 한국 노동자연대와 정치적 공통점이 많고, 빈센트 성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트로츠키주의》를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빈센트 성은 자신이 7월 24일에 중국어로 쓴 이 기사를 한국에 소개하려고 한국어에 능한 친구의 도움을 구해 우리말로 옮긴 뒤 본지에 기고했다.

독자들은 한국과 다른 조건에서 활동하는 동지가 쓴 기사를 보며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이 본지의 그리스 보도 논조와 온전하게 같지는 않을 수 있다.


7월 초부터 중순까지의 그리스 정세는 드라마틱하고 빠르게 변하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7월 5일의 국민투표에서 반대표 운동을 했던 대중과 노동계급이 보여 준 힘은 확실히 1970년대 이래 수십 년간 그리스에서 볼 수 없던 것이고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한 평론은 군중 동원 측면에서 1974년 포르투갈 혁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국민투표 결과, 62퍼센트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 반대표가 나왔지만, 1주일도 채 안 돼 집권당 시리자는 트로이카와 3차 구제금융을 협상키로 하면서 원래의 것보다 더 가혹한 긴축안을 받아들였고, 국회에서 새 긴축안 통과를 강행해 대중의 거대한 반발과 시리자 내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잠시 주제를 벗어나 지난 국민투표의 내용을 설명하려 한다. 지난 국민투표는 트로이카가 이전에 내놓은 구제금융 긴축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것이었다. 그리스 정부 자신이 트로이카에 내놓을 구제금융 방안에 대한 찬반은 국민투표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만과 홍콩의 주류 언론이 말했듯 반대 진영의 승리가 곧 ‘디폴트’인 것은 아니었다. 시리자 지도부는 이 국민투표 결과를 이용해 트로이카에 자신의 구제금융 방안을 제출했다. 더욱이 그때까지 그리스 정부 대표는 트로이카와 구제금융 협상을 하면서 ‘디폴트’나 ‘채무미상환’을 요구한 적이 없고, 그저 ‘채무 재조정’ 방안에 대한 재량권을 요구한 것뿐이다. 하지만 모두 트로이카에게 거절당했다.

여기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국민투표가 긴축을 반대하는 대중투쟁과 노동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둘째, 국민투표 후 국회는 이전보다 더 엄격한 긴축안을 통과시켰고 전 그리스 재무장관 바루파키스는 이것이 파시스트 황금새벽당의 성장을 부추길 것이라 평가했는데 정말 상황이 그런가?

셋째, 새 긴축안 통과 후 그리스 노동계급의 반긴축 투쟁은 어떻게 발전할까?

첫째로 이번 국민투표에서 젊은이들의 반대 투표 비율이 가장 높았다. 반대표를 던진 연령층 중 18~24세가 85퍼센트(통계 수치: Greek Referendum 2015 : “NO” voter demographics)였고, 처음 투표하는 18세 청년들이 많았다. 이 젊은이들은 모두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 이후 성장한 세대로 대부분 유럽연합에 반대하고 유로존 탈퇴(그렉시트)의 대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그들이 보기에 유럽연합은 긴축 정책, 은행 집단의 이익, 비민주적 의사 결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투표는 계급 대결 투표였고 그리스 현지의 주류, 우파 매체들조차 ‘계급 투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표를 던진 이들은 주로 기층 민중, 노동계급, 중간계급 하층이었고, 자본가 계급, 상층계급, 사장 등은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투표 전날 반대와 찬성 진영의 여론은 팽팽했다. 찬성 쪽은 대재벌 자본가뿐 아니라(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찬성표를 던지라고 협박함) 민영 미디어의 일사불란한 선전 기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더 황당하게도 유럽연합 관리들은 번갈아 가며 반대표 승리는 곧 ‘그리스의 그렉시트’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유럽은행은 ‘통화 숨통 조이기’ 조처를 실시했고 긴급유동성지원 한도 상향을 거부해서 현금 인출 사태로 그리스 은행이 1주일간 폐쇄되는 공황 상태를 일으켰다. 하지만 대중들은 어떠한 위협과 협박도 두려워하지 않고 높은 반대표로 자본가 계급과 트로이카에게 큰 반격을 가했다.

사실 이번 국민투표에서 반대표의 승리는 과거 수년간 계속된 아래로부터 조직된 노동계급의 반긴축투쟁에 힘입은 바 크고, 이번 투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대표적인 사건을 두 가지만 꼽자면, 첫째로 2년 전 국영방송국 ERT 노동자들이 방송국 폐쇄에 반대하며 벌인 점거 투쟁을 들 수 있다. 당시 [그리스의] 우파 정부는 트로이카의 긴축안에 협조하기 위해 갑자기 방송국 폐쇄를 발표했고 곧이어 2천6백 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방송국 로비를 점거하고 자체 방송을 계속했고, 대중은 방송국 로비를 점령한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경찰의 진압을 저지했다. 올해 6월 시리자는 ERT의 방송 재개를 발표하고 노동자들을 재고용했다. 또 다른 사례는 재무부 [건물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해고 반대 투쟁이다. 2013년 9월 재무부가 5백95명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을 해고하자 노동자들은 재무부 아테네 총본부 밖에 천막을 치고 20개월간 노숙투쟁을 진행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다수 민중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그 결과 올해 5월 복직을 쟁취했다. 이 밖에도 노동계급의 크고 작은 자발적 투쟁이 수없이 있었다. 요컨대 그리스 노동계급은 스스로 조직하고 동원해 반긴축투쟁을 진행했던 것이다.

둘째 문제는 전 재무장관 바루파키스가 이번에 트로이카의 새 긴축안을 받아들인 것이 파시스트 황금새벽당의 힘을 키울 것이라 경고한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물론 깊이 살펴보고 경계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는 일부러 그 위협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 분명 지난 수년간의 긴축 정책이 낳은 경제·사회적 위기는 황금새벽당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들은 2012년 국회선거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획득했고 그 당원들이 저지른 다수의 습격사건과 이민자 살해사건은 여전히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경찰인 황금새벽당 당원은 경찰 고위층의 비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환점이 있었다. 바로 2013년 9월 18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래퍼 파블로스 파이사스가 황금새벽당원에게 살해되자 전국적인 반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 래퍼가 살해된 뒤, 2012년에 다수의 좌파단체와 노동조합 인권조직과 이민단체가 조직한 ‘인종차별·파시즘 반대 운동’(KEERFA)은 항의 시위를 조직했다. 2013년 9월 26일 5만 명이 아테네에 집결해 황금새벽당 본부로 행진하며 당국이 즉각 황금새벽당을 단속할 것을 요구했고, 당시 신민주당이 이끌던 연정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실 신민주당은 집권 후 경제·사회적 위기를 이민자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터라 사실 황금새벽당과 한 통속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파블로스가 살해된 뒤 벌어진 전국적 반파시스트 투쟁은 노동자들의 반긴축투쟁과 맞물려 정부를 끌어내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신민주당은 어쩔 수 없이 황금새벽당의 고위 지도자 몇 명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대중의 분노가 지배계급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막았다.

황금새벽당은 이 사건을 겪은 후 그 기세가 다소 꺾였다.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지지자들에게 반대표를 호소해 새롭게 지지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황금새벽당원들은 이 운동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또 조사에 따르면 이 당 지지자 중 60퍼센트는 실제론 찬성표를 던져 그 계급성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또 황금새벽당은 반긴축투쟁의 주요 역량인 노동조합 세력이 하나도 없다. 현재로선 긴축 조처가 황금새벽당을 다시 성장케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 민중의 반파시스트 운동은 이미 일정한 사회 역량을 형성하고 있고, 반파시스트 역량과 반긴축투쟁이 서로 결합한다면 황금새벽당을 철저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 KEERFA와 반자본주의좌파연합 안타르시아는 지역에서 이를 위한 교육과 선전작업을 하고 있다. 또 2013년부터 매년 10월에 반인종차별, 반파시스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셋째,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변혁하고 유로존을 떠나고 은행 국유화를 바라는 단체나 노동조합은 이번 사건을 겪으며 시리자의 진면목을 똑똑히 보고서 이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 정세는 그리스 노동계급의 반긴축 투쟁에 어떤 영향을 줄까? 먼저, 시리자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개혁주의 노선을 표방하고(좌파 연대(Left Platform) 등 내부의 일부 성원은 그렇지 않지만) 선거를 통해 [집권해서] 자본주의를 개혁하려 한다. 시리자는 애초 대중에게 일련의 반긴축 정책들을 제시했기에 선출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자는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의회의 논리에 철저히 무너졌다. (이에 대해서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쿠벨라키스의 최근 논쟁 영상을 보라.) [본지 152호 기사 ‘영국 ‘맑시즘2015’ 현장 취재: 쿠벨라키스 VS 캘리니코스 — 시리자가 실패한 지금, 혁명가들의 과제는 무엇인가?’ 참조]

시리자

시리자는 결국 신자유주의에 무릎 꿇었고, 모종의 신노동당식 신자유주의-사민주의 세력이 됐다. 하지만 그들의 의회주의 노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거에서의] 주요 경쟁자였던 신민주당은 지난 국민투표에서 찬성 진영의 핵심이었는데 그 참패 때문에 당대표가 이미 사퇴해 지도자도 없고 방향도 잃어 버렸다. 구 사민주의 정당인 그리스 사회당(PASOK)은 올해 초 총선 참패 후 기를 못 펴고 있다. 게다가 치프라스는 긴축안 국회 통과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특히 ‘좌파 연대’ 의원들에 대해서 그렇다. 따라서 설사 치프라스가 머지않아 총선을 선포해도 시리자는 계속 집권할 가능성이 크고 현재로선 중도우파정당과 연정을 꾸릴 필요가 없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 노동계급은 반긴축투쟁을 위해 이미 자발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있다. 만약 더욱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긴축 조처에 균열을 내려면 더욱 강력한 조직을 건설해 이 투쟁을 이끌게 해야 한다. 이 당연한 이치를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헝가리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는 그의 명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노동계급에게 ‘부여된 계급의식’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노동계급이 객관적 사회 상황 속에서 직접행동에 나서고 전체 사회구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자본주의 위기 속의 자발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처럼 자발적인 투쟁이 보여 주는 계급의식을 일관된 전략과 체계적인 실천적 지도로 바꾸어 사회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둘째 의미와 연결되는데 바로 조직 문제이다. 루카치는 책에서 공산당(스탈린이 권력을 잡기 전의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논하고 있다.

현재 그리스에서 어느 조직이 노동계급을 이끌어 반긴축·반자본주의 투쟁을 이끌 수 있을까? 시리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안의 ‘좌파 연대’와 같은 단체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 공산당은 지방의 노동조합에서 일정한 세력을 갖고 있지만 지도부의 종파주의 때문에 지난 국민투표에서 보이코트와 기권을 호소하다 웃음거리 됐으며, 그들의 지지자들도 대부분 반대표를 던졌다. 안타르시아는 세력이 비록 미약하지만 전투적인 조직이다. 이번 국민투표 [반대표] 동원에서 안타르시아와 시리자 내부의 일부 단체는 함께했다. ‘좌파 연대’가 안타르시아와 연합해 더한층 강력한 반자본주의 좌파를 건설한다면 노동계급 긴축 반대 투쟁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스와 유럽의 좌파진영 안에서 이런 가능성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요약하면 비록 시리자는 새 긴축안 통과를 주도했지만 결코 노동계급의 반긴축 결심을 흔들지 못했다. 국회가 7월 15일 긴축안을 표결할 때 각 노동조합은 전국적 파업을 개시했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치프라스의 국민투표는 하나의 정치 도박이었고 트로이카와의 협상을 위한 카드였지만 그는 국민투표가 오히려 노동계급과 대중의 거대한 반긴축투쟁 역량을 풀어놓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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