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독일의 ‘하르츠 개혁’을 “노동시장 개혁”의 모범 사례로 제시했다. 독일이 하르츠 개혁을 통해 고용과 투자를 활성화시켜 “유럽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하르츠 개혁은 2003년에 사회민주당(SPD)의 슈뢰더 정부가 추진한 것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핵심 내용이었다.

하르츠 개혁 시행 10년이 된 2015년 현재 독일의 실상은 박근혜 정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즉, 기업의 이윤 증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려는 것이다.

하르츠 개혁은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지배자들의 대응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잘 나가던 독일 경제는 1990년대 들어 뒤처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독일은 미국은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도 더 성장률이 낮아져서 말 그대로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았다. 특히 당시 미국 경제는 1980~90년대에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등 착취율을 증대한 덕분에 일본이나 독일보다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하르츠 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세트인 ‘어젠다2010’은 이런 상황에서 도입됐다. 독일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공격함으로써 독일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다. 1980년대에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가 했던 구실을, 독일에서는 2000년대에 사민당의 슈뢰더 정부가 한 것이었다.

하르츠법 조항 중에서 특히 4번 조항(하르츠IV)이 가장 큰 공분을 샀다. 하르츠Ⅳ는 단지 실업급여를 삭감하는 것뿐 아니라 실업자들에 대한 새로운 제재 조처(이른바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내용이었다. 실업자들은 정부의 일자리 제안을 거절하면 실업급여가 삭감되거나 아예 못받게 됐다. 지원을 받으려면 그만큼 기여를 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복지 논리가 도입된 것이다.

이 정책은 시간제, 파견제 같은 저질 일자리 확대 정책(하르츠Ⅰ)과 연동됐다. 정부는 실업급여 제재 조처를 이용해 실업자들에게 저질 일자리를 강요할 수 있었다. 또한 하르츠Ⅳ는 실업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을 길들이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실업자가 되면 빈곤해질거라는 두려움이 커지면,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이나 노동조건 악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노동자들은 하르츠법을 복지국가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일 뿐 아니라,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하르츠법에 반대해 전후 최대 규모 시위가 벌어지다

박근혜는 독일이 “노동시장 개혁”과 함께 “노사 간 협력관계”도 구축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독일 노동자들 사이에는 하르츠법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하르츠법 발표 직후 사민당 탈당이 잇따랐고 사민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한 세기 넘게 이어져 온 독일 노동운동에 대한 사민당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2004년 3월 3일에는 베를린과 쾰른, 슈투트가르트와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50만 명이 하르츠법 반대 시위를 벌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시위에는 금속노조(IG Metall)와 서비스노조(Ver.di)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했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사민당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사민당 정부에 맞서 행동하기를 주저했다.(심지어 금속노조와 서비스노조 지도부는 하르츠법을 추진한 노사정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사민당은 전후 독일공산당이 영향력을 잃은 이후에 노동자 운동에 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행사해 왔다. 사민당과 독일노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는데, 사민당은 정치를 담당하고 독일노총은 경제를 담당하는 식이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2004년 3월 3일에 딱 한 번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그 뒤로는 대중 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않았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힘을 한 번 보여 주면, 정부가 하르츠법의 가장 나쁜 조항을 약간 고쳐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슈뢰더는 법안을 누그러뜨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슈뢰더는 사민당 정부가 위기에 빠지면 보수당이 집권할 거라고 협박함으로써,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독일노총(DGB) 지도자들은 하르츠법 반대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다수 독일 노동자들의 뜻은 달랐다. 하르츠법 반대 시위는 2004년 여름에 옛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분출했다. 당시 옛 동독 지역 실업률은 18퍼센트나 돼서 이곳 주민들은 실업급여 삭감에 훨씬 더 민감했다.

시위는 월요일마다 열렸는데, 이것은 15년 전에 동독 정권을 무너뜨렸던 시위의 전통 중 하나였다. 가장 절정에 올랐을 때, 이 시위에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 시위는 옛 서독 지역까지 확산되지 못하고 몇 달 만에 사그라들었다. 사민당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독일노총 지도부의 방해 속에서 시위가 더 확산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런 저항 분위기는 서쪽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가령 2004년 가을에 GM계열의 자동차회사인 오펠(Opel) 노동자들은 대규모 인력감축 소식을 듣자마자 1주일 동안 전격적인 파업을 벌였다. 당시 이 파업은 유럽 전체에서 연대의 초점이 됐다.

또한 2004년의 투쟁들은 그후 노동자들의 이례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2006년에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조건 악화에 맞서서 3개월가량 파업을 벌였고, 독일텔레콤 노동자들도 임금삭감과 외주화에 맞서 5주 동안 파업했다.

당시 하르츠법 반대 투쟁이 법안 시행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사민당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슈뢰더는 2005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선거에서 사민당이 대패하고 나서 재선거(총선)를 선언해야 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오랫동안 사민당의 ‘표밭’이었다.

사민당은 표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하르츠법 통과 이후 몇 년 사이에 사민당 당원은 18만 명가량(전체 당원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 줄었다. 나아가 사민당에 대한 환멸과 정치적 대안 갈망 속에서 좌파당(디링케)이 등장했다. 사민당에 환멸을 느껴 박차고 나온 이들이 좌파당 창당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하르츠법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던지, 2013년 9월 총선에서 공개적으로 하르츠 개혁을 지지한다고 밝힌 정당은 한 곳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정당들은 하르츠 개혁을 되돌려 놓겠다고 공약했는데, 심지어 사민당도 그랬다. 말하자면 독일 사민당조차 더 이상 감히 지지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정책을 박근혜 정부가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하르츠 ‘개혁’ 10년: 저질 일자리↑ 실질임금↓ 빈곤율↑

독일에서 “하르츠법”은 “가난”과 “배제”의 대명사가 됐다. 하르츠 개혁이 시행된 지난 10년 동안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실업률이 하락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는 실업급여 삭감 위협을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시간제 같은 저질 일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덕분이었다. 현재 독일 노동자의 4명 중 1명이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한다. 여성이거나 나이가 어릴수록 시간제로 일할 가능성이 더 크다. 수출 기업들은 수출 시장의 상황에 따라서 시간제 노동자들을 쉽게 고용했다가 쉽게 해고했다.

그림1 . 독일의 실질임금과 1인당 실질 GDP (1992~2011). 출처: VoxEU.org
그림2. 독일의 빈곤율 (1992~2010). 출처: EUROPP

오늘날 청년들이 일자리를 원하는 이유는 가난을 피하기 위해서이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고용 조건이 나빠지면서 실질임금도 하락했고(그림1), 빈곤율도 눈에 띄게 늘었다(그림2). 옛 동독 지역의 빈곤율은 20퍼센트에 이른다. 독일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0퍼센트가 지난 몇 년 동안 가난하거나 또는 소득이 줄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2012년에 OECD 보고서도 “독일은 유럽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소득 불평등이 증가한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올해 독일이 최저임금제를 도입한 것은 저질 일자리와 빈곤율 증대,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불만 증대와 관련이 있다.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렇듯 독일이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도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년 동안 착취율을 끌어올린 덕분이다.

지난해와 올해 독일의 노동자 투쟁은 유례없이 활발한 상태다. 가령, 독일철도 기관사 노조는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해 철도를 마비시켜 독일 경제에 하루에 1억 유로(1천 3백억 원)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다. 지난 5월에는 한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우체국 노동자와 교사들도 파업 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런 투쟁들도 하르츠법을 비롯해 지난 10여 년간 추진돼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철도 민영화나 병원 구조조정, 예산 삭감)이 낳은 노동조건 악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일의 경험은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막지 못했을 때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떻게 악화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또한 청년들의 첫 직장이 저질 일자리일 가능성이 더 커졌을 뿐, 노동시장 구조개악이 “청년실업 해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 준다. 민주노총이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막기 위한 투쟁 건설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