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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뉴딜 ─ 신화와 현실

이른바 한국형 뉴딜 정책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지만, ‘원조’ 뉴딜의 성과 자체는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뉴딜 정책의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했고 대공황이 시작됐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산업 생산은 28퍼센트 하락했다. 실업자가 12만 9천 명에서 7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물가는 33퍼센트 하락한 반면 고용 노동자들의 임금은 39퍼센트 하락해 실질임금이 하락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기업 파산과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과 완전한 자유 시장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1931년이 되자 몇몇 기업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 경제 전체가 파산할 지경이 됐다. 결국 후버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로즈벨트에게 참패했다.

1933년 로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의 산업생산은 1929년의 56퍼센트 수준이었고 실업자는 1천3백70만 명이나 됐다. 의회가 대규모 고용 창출을 위해 주당 노동시간을 30시간으로 단축하는 법률 제정까지 검토할 만큼 상황은 절박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로즈벨트는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실업자들에게 긴급 원조를 제공하고 임시직과 건설 사업의 일자리를 마련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국유림에서 일하게 했다. 값싼 전력의 대량 공급, 홍수 예방, 수로 개선, 질산 비료 생산 등의 목적으로 테네시강 유역 개발 사업을 실시했다.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정부가 곡물을 구입·폐기해 곡물 가격을 올리려 했다. 산업부흥국(NRA)을 만들어 산업체의 노동조합·임금·노동시간·아동노동·단체교섭 등에 관한 규율들을 관장하게 했다.

1935년에는 와그너법이라는 노동조합보호법을 제정해 노동조합 결성 조건을 완화하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강화되게 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쉽게 해 소비 수요를 증대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예컨대, 공공사업진흥국(WPA)은 8년 동안 약 1백10억 달러를 들여 8백50만 명을 취업시켰으며, 1백4만 6천 킬로미터 이상의 도로, 12만 5천 개의 공공 건축물, 7만 5천 개의 다리, 8천 개의 공원, 8백 개의 공항을 만들어냈다.

이런 정책들은 제한적이나마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됐다. 회복은 처음에는 미미했지만, 1935년에는 실업자가 1천2백만 명까지 줄어들었고 1936∼37년에는 물가가 급등하고 생산이 급증했다.

그러나 정부 지출이 대폭 삭감되고 그와 동시에 기업들이 호황 동안 비축한 완제품 재고를 줄이자 경제는 다시 급속히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1937년 8월 미국 역사상 가장 급격한 경기 후퇴가 시작돼 1932년 이후 여러 지표에서 나타난 성공의 절반이 사라졌다.

철강 생산량이 4개월 만에 3분의 2 이상 줄었고 면직물 생산은 40퍼센트쯤 줄었으며 농산물 가격은 4분의 1이나 떨어졌다. 1937년 9월과 1938년 5월 사이에 산업 생산은 30퍼센트 하락했고 실업은 22퍼센트나 늘었다.

이 경제 불황은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 경제가 전시 체제로 재편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 자본주의는 전시 경제로 돌입한 뒤에야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었고, 농가 수익도 1941년이 돼서야 1929년 수준을 회복했다.

사실, 뉴딜의 진정한 성과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었다. 1935∼39년에 제정된 사회보장법은 노인수당·과부수당·실업보상·노동장애자보험 등을 마련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사회복지 제도의 기초가 됐다.

물론 로즈벨트가 그렇게 한 것은 대공황이 초래한 사회적 반란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미국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회보장 제도 덕분에 로즈벨트와 민주당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때 형성된 민주당과 노동조합의 연계는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로즈벨트는 때때로 “나야말로 이윤 체제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자산가들은 모르고 있다” 하고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