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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연금 사회적 기구’ 논란:
민주노총은 보험료 인상을 열어 둬서는 안 된다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사회적기구’(이하 ‘사회적기구’)가 여야 합의 뒤 거의 넉 달만에 구성됐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석 달 전 구두로 합의한 위원 추천권을 두고 막판까지 실랑이를 벌이며 김을 뺐다. 이제 국회 규칙에 명시된 종료 시점까지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아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은 이렇게 시간만 질질 끌다가 먹튀할 심산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는 아예 공적연금 ‘강화’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초 임시국회에서 새누리당이 공무원연금 개악의 반대급부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퍼센트로 인상’ 약속을 하려 하자, 박근혜는 공무원연금 개악안 처리가 늦춰지는 것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를 가로막은 바 있다. 재정 절감을 위해 공무원연금 개악을 추진했는데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을 인상하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정 안정성 논리를 내세운 정부의 복지 삭감은 노동자들에게 경제 위기의 고통을 떠넘기는 한편, 자본가들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으로 돌아간다. 일체의 복지 삭감 시도에 일관되게 반대해야 하는 까닭이다. 기업주·부자들은 고통을 ‘분담’할 생각이 없다.

박근혜는 오히려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개인연금의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조처를 도입했다.

새정치연합이 이들에 맞서 공적연금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비주류일지라도 자본가 계급 일부에 기반을 둔 당인 데다가 연금 등 복지 삭감에 관한 대부분의 전제를 새누리당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시절 국민연금을 3분의 1이나 삭감했고 박근혜의 기초연금 먹튀도 도와준 바 있다. 공무원연금 개악도 자신들 덕분에 가능했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기껏해야 소득대체율을 찔끔 올리는 대신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는 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기구 설치를 합의하는 과정에서도 ‘보험료 인상’을 명시할 것인지 말지가 논란이 된 바 있다. 국회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 빈곤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공적연금 특위) 위원장을 맡은 새정치연합 강기정은 “보험료율 인상 문제는 여야 모두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새정치연합의 전신)은 보험료를 12.9퍼센트로(현행 9퍼센트) 인상하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노후 빈곤 문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보험료를 일부 인상해서라도 연금을 인상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측이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하니 결국 나 중에 받는 돈을 생각하면 노동자들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실제로 기업주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보험료 인상에 반대한다. 주류 언론들이 ‘보험료 폭탄’ 논리를 펴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기업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처럼 민간연금에는 없는 국민연금 제도의 특징을 높이 평가하며 ‘더 낼수록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저축계정 도입안

그러나 단지 제도가 이렇게 돼 있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면 이익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거나 자기기만이다.

먼저 제도 자체를 변경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여야 의원 28명은 기업주들의 부담을 늘리지 않고 노동자들만 보험료를 더 내는 저축계정 도입안을 공동발의했다. 그나마 더 받고 싶은 사람만 더 내라는 식이어서 소득이 많을수록 유리한 제도다. 이런 식이면 개인 연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연금 인상이 미래에 대한 ‘약속’인 반면, 보험료 인상은 당장 실질임금 삭감 효과를 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류 정치인들의 약속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험료를 올려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안에 부정적이다. 여론조사 기관의 발표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지난 5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조사 결과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면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응답이 54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런 반대가 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했다고 여기는 것은 노동자들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1988년 도입 당시 ‘보험료 3퍼센트, 소득대체율 70퍼센트’였던 국민연금은 현재 ‘보험료 9퍼센트, 소득대체율 40퍼센트’로 크게 후퇴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 보험료를 올려놓고 또 소득대체율을 깎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에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20퍼센트까지 낮추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2008년에 도입된 기초노령연금은 2028년까지 처음의 두 배로 인상하도록 법에 명시돼 있었는데도 이행되지 않다가 박근혜 정부는 아예 이를 폐기해 버렸다.

경제 위기가 계속되면 연기금의 수익율도 지금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기금 고갈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며 또 삭감 얘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연급 지급 개시 연령이 67세까지 늦춰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보험료 인상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주들의 부담을 늘려 연금을 인상해야 한다. 기업주들의 부담을 OECD 평균 수준으로만 인상해도 연금 소득대체율을 크게 올릴 수 있다(그림 1). 또, 법인세 인상 등 부자 증세로 기초연금을 확대해야 한다.

그림 1. OECD 국가들에서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연금 기여 비율. 한국 기업주들의 기여 비율은 OECD 평균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단위 GDP 대비 퍼센트)

물론 이런 일이 실현되려면 노동자들의 힘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져야 한다. 물론 지금 당장 연금투쟁이 불 붙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사회적 기구처럼 애당초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짜여진 기구에서 타협안을 만들어 내는 데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잠재력을 갉아먹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일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지금 상황을 보며 공무원연금 개혁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듯하다. 이들은 지난 5월 사회적기구 설치를 약속하며 공무원연금 개악을 통과시키려 한 여야 합의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았다. 공무원연금 개악을 일부 수용해서라도 사회적기구를 통해 다른 공적연금을 강화하면 이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연대와 노동조합 내 일부 좌파 활동가들이 비판한 것처럼, 사회적기구는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잘해야 한 달 정도 운영되는 동안 보험료 인상 같은 개악안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박근혜의 공무원연금 삭감이 씁쓸하지만 공적연금 전체를 개선하려면 공무원 노동자들이 한발 물러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여긴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먹튀’를 당할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무척 큰데도 사회적기구라는 ‘어음’을 받고 ‘사상 최대의 공무원연금 개악’이라는 ‘현찰’을 내준 데 있다.

5월 2일 공무원연금 개악에 반대하며 국회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인 공무원·교사 노동자들 사회적 기구는 ‘공적연금 강화’는커녕 공무원연금 개악을 위한 미끼였을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조승진

민주노총 내 논의

한편, 민주노총은 중집 회의에서 격론 끝에 사회적기구 참여를 결정했다. 격론이 벌어진 것은 사회적기구가 부도난 ‘어음’이 될 공산이 점점 커지고, 설령 가동돼도 개악을 둘러싼 논의가 될 가능성이 적잖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민주노총은 사회적기구 참여를 결정한 후 교섭원칙으로 “보험료 인상 및 수급연령 상향 등 국민연금 개악이 병행될 경우” 즉각 탈퇴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기구가 부도난 어음이 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오히려 사회적기구에 더 매달리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 내 일각에서 정부 부담을 늘린다면 ‘보험료 인상’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보험료 인상” 등 개악이 병행될 시 즉각 탈퇴라는 입장에서 민주노총이 더 후퇴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보험료 인상안을 수용할 경우 이는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할 위험도 있다. 민주노총은 보험료 인상 방안을 결코 열어둬서는 안 된다.

‘공적연금 강화 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 안에서도 공무원연금 개악 당시의 ‘대타협기구’와 달리 사회적기구는 공적연금 ‘개선’을 논의하는 자리이므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희망사망일 뿐 사실도 아니고 당면한 투쟁 과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다.

특히, ‘보험료 인상안’을 논의할 수 있다며 사회적기구 운영에 매달리는 것은 박근혜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 등에 맞서 싸우는 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게다가 사회적기구에서 실컷 논의해도 결정은 결국 국회 특위에서 한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부도난 ‘어음’이 될 가능성이 큰 사회적기구 합의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또, 일각에서 제기되는 보험료 인상 같은 양보안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재천명하고 박근혜 정부의 공격에 맞서 당면 투쟁 과제를 조직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