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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 잠정합의:
사측의 손배 공세와 금속노조의 후퇴가 낳은 산물

현대차 사측과 금속노조, 정규직지부, 울산 비정규직지회가 9월 14일 ‘2017년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2천 명을 추가로 신규채용 한다’는 내용의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사측은 지난해 8·18 신규채용 합의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김 없이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등을 취하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고약하게도 이번 합의에는 신규채용에 응하지 않고 개별 소송을 이어가는 길을 원천 차단하는 문구도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해고자투쟁위원회가 9월 14일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잠정합의안에 반대해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해고자투쟁위원회

물론, 이번 합의에는 8·18 합의보다 조금 진전된 내용도 있다.

8·18 합의 때는 사내하청으로 일했던 근속을 1~4년 인정했지만, 이번에는 그 두 배인 최장 8년까지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격려금조로 5백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특히 노조에 퍼부어진 2백억 원에 이르는 손배·가압류가 철회될 기회가 생겼다.

다만 노동자들의 기대를 부추겼던 소문, 즉 ‘조합원들을 내년 말까지 전원 신규채용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단지 ‘노사가 최선을 다한다’고 했을 뿐인데 이는 안 지키면 그만이다.

8·18 합의에서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수십여 명이 신규채용에서 배제됐다. 더구나 2010년 이전에 해고된 조합원, 2~3차 하청 조합원들은 대상에서 빠졌다.

이번 합의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 3천여 명 이상이 신규채용에서 배제됐다. 이에 더해 함께 싸워온 조합원들끼리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 때문에 많은 조합원들은 합의안에 불만을 터뜨렸다. 9월 16일 열린 조합원 보고대회는 조합원들의 항의와 반발 속에 파행으로 끝이 났다.

“격려금 5백만 원 더 받자고 지금껏 싸운 건 아니지 않냐. 8·18 합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합원조차 ‘전원’ 보장이 안 되는데, 왜 이런 안을 가져온 건가?”

선고 연기와 손배 압박

이번 합의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2심 판결을 앞두고 나왔다. 사측은 지난해 8·18 합의 때와 꼭 마찬가지로 8월 말 예정됐던 선고의 연기를 신청하며 합의를 압박했다.

사측에겐 더 다급한 사정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조립라인이냐, 엔진·차체·서브 등 소위 “간접부서”이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엇갈릴 수 있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1심 판결에서 간접부서, 2~3차 하청까지 포함해 생산직 사내하청 전원을 불법파견으로 인정했다. 올해 2월엔 대법원이 다시 이를 준용해 아산 사내하청 노동자 7명에 대해서도 불법파견 판결을 내렸다.

이 때문에 사측은 비정규직지회가 소송을 포기하도록 비열한 압박을 끈질기게 가했다. 특히 손배가압류를 통한 압박은 숨이 막히는 수준이었다. 2010년 이후 현대차가 비정규직지회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제기한 손배 청구액은 무려 2백13억 원에 이른다. 더구나 그 대상에는 노조뿐 아니라 조합원 수백 명도 포함됐다.

사측은 8·18 합의 이후, 소송을 포기하고 신규채용된 노동자들은 손배에서 제외시켜 줬지만, 비열하게도 나머지 대상자들에게 그 청구액을 떠넘겼다. 신규채용이 있을 때마다 남은 노동자들에게는 점점 더 큰 부담이 가해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부 해고자와 전·현직 간부들이 지회를 탈퇴해 복직하거나 신규채용에 응시하는 일도 잇따랐다. 이들은 지회의 8·18 합의 거부 방침을 비난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남아 있는 조합원들을 또 흔들었다. 그간 투쟁에 앞장섰던 박현제 전 지회장이 사측 관리자와 부적절한 만남을 가진 것이 드러나, 지회는 또 한 차례 커다란 내홍을 겪기도 했다.

요컨대, 8·18 합의를 단호히 거부했던 지회 집행부가 사측의 손배가압류 압박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결국 이번의 잠정합의에 사인하는 데에 이르게 된 듯하다.

이경훈 집행부의 압박과 금속노조의 후퇴

무엇보다 8·18 합의 이후 금속노조 내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투쟁의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지난해 울산 비정규직지회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8·18를 거부하며 투쟁을 시작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은 이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 줬다. 그 해 11월 열린 금속노조 대의원들은 이들이 잘못된 합의에 발목 잡히지 않고 굳건히 투쟁을 지속하기는 바라는 마음을 담아 “8·18 합의 폐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올해 1월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는 이 같은 대의원대회 결정을 번복해 8·18 합의를 사실상 인정한다고 결정하고, 전규석 위원장 명의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이다.

이경훈 지부장은 자신이 체결한 합의에 흠집이 생기고 정치적 명분을 잃을까 봐 중집을 압박했다. 전규석 집행부는 이에 치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투쟁하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사기를 꺾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경훈 우파 집행부는 고사하고, 좌파로 분류되는 금속노조 집행부까지 자신들의 요구와 대의를 부정한다고 여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아쉽게도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도 투쟁하는 비정규직을 확실하게 방어하지 못했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앞두고 노동조합 내 분열이 일어서는 안 된다’는 전규석 위원장의 논리에 흔들렸다. 8·18 합의에 비판적이었던 현대차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끝까지 비정규직지회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길 주저했다.

사측의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금속노조조차 대의를 지켜주지 못하자, 지회 내부의 내홍도 커졌다. 그리고 4월에는 파업 찬반투표가 부결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돌아보면, 지난해 법원 판결이 났을 때, 지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조합원을 조직하고 투쟁에 나설 필요도 있었다.

조합원들의 반발

종합해 보면, 이번 신규채용 합의는 8·18 합의의 고통스런 여파 속에 있다. 사측은 울산 비정규직지회를 고립시키려고 탄압을 퍼부었고, 이경훈 집행부와 금속노조 중집은 8·18 합의를 거부한 지회의 대의를 부정했다. 이 속에서 지회의 조직이 이완되고 투쟁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그럼에도 지난 16일 보고대회에서 현장 조합원들의 반발이 보여 줬듯, 만족스럽지 못한 신규채용 기회에 들어가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경쟁해야 하는 상황은 적절치 않다. 어려움 속에서도 “2심 판결을 기회 삼아 다시 싸움을 해 볼 수 있다”는 일부 조합원들의 제기도 옳다.

비정규직 투사들은 어렵지만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키고 다시금 투쟁의 대안을 건설해 가야 한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선 투쟁이 조직되는 상황도 적극 활용해 볼 만하다.

활동가들은 거듭 타협을 압박하는 정규직노조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으로, 기층에서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단결해 싸울 수 있는 네트워크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단한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