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억압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가부장제 이론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와 좌파들이 가부장제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많든 적든 받아들인다. 혁명적 좌파 일각에서도 가부장제 이론(또는 개념)의 수용 여부는 하나의 쟁점이다.

가부장제는 원래 남성 가장(아버지)이 나머지 가족 성원들의 노동력을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가족 형태를 묘사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페미니즘에서는 이런 제한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말하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뜻으로 사용되고, 심지어 그저 여성 억압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구분되는 여성 억압 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뜻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이론의 핵심 함의는 ‘남성 지배는 특정한 경제적 생산양식을 초월해 존재하고 혁명적 사회 변화가 일어나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부장제 개념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과는 독자적인 여성 억압 이론을 개발하려는 시도에서 발전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별 권력 관계(“남성과 여성은 지배·피지배 관계”)가 여성 억압의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성 억압을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남성의 본성처럼 치부함으로써 여성 억압의 토대를 밝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 내에서도 ‘생물학적 환원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남녀 분리주의, 계급 투쟁과 분리된 별도의 가부장제 반대 투쟁이라는 전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여러 종류의 페미니스트들(특히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도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접목했다. 이들은 대개 착취를 설명할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유효하지만, 억압을 설명할 때는 가부장제가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의 논리에 열려 있었다.

그 중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 양식’이나 심리적 영역으로 본 이론가들은 그것의 토대가 무엇인가는 밝히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와 달리, 나름으로 가부장제의 물질적 토대를 밝히려 한 시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이디 하트만은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가 여성억압의 물질적 토대라고 주장했고, 남성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공모해 보호입법과 가족 임금을 확보함으로써 여성 노동력을 통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현대 페미니즘의 여성 노동 이론에서 여전히 자주 인용된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이 특정 직업에 진입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일부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고, 그 핵심 성격도 ‘노동 희석’, 즉 여성 노동자의 진입으로 인해 임금이 떨어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탄광에서 여성의 지하 작업을 금지하거나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규제한 보호입법은 여성에게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가족 임금 요구 역시 남성 노동자의 음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녀 노동계급 모두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집 밖에서 혹사당하는 끔찍한 현실을 완화할 그나마 나은 대안으로 가족 임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를 부양할 만한 충분한 임금을 실제로 보장받는 남성 노동자들은 거의 없었고, 가족 임금제가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경향을 막지도 못했다.

당시 두 가지 생산양식 이론이 생겨난 배경에는 이른바 ‘사회주의’로 불리는 옛 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북한 같은 체제에서 여성 억압이 온존하는 현상을 보며 많은 좌파들이 느낀 혼란도 있었다. 자본주의가 사라진 사회에서도 여성 억압이 남아 있다면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와 별도로 작동되는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들에서 나타난 여성 억압은 사회주의에서도 여성 차별이 계속된다는 점을 입증한 게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 파괴됐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나라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줄 뿐이다. 1920년대 말쯤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파괴하는 반혁명을 이끌었다. 그 후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인간의 필요가 아닌 서방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강박적 축적에 매달리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종속적인 지위로 전락했다. 소련을 모델로 건설된 동유럽과 중국, 북한 등의 국가들에서는 아예 노동자 혁명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그 사회 성격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한 변형태일 뿐이었다.

오늘날에는 반세계화 운동의 성장 속에서 벌어진 급진화 때문에 페미니즘 내에서도 계급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인 페미니즘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로는 여성 억압을 온전하게 설명할 순 없고, 별도의 분석이 보완돼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계급 문제를 중시하는 반면 억압을 부차적으로 여기고, 특히 재생산, 가족,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이론의 진정한 차이점은 억압을 중시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억압의 근원을 무엇으로 보고 억압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됐지만 결코 보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시작했다고 본다. 19~20세기까지 살아남은 수렵·채집 사회들을 조사한 인류학자들(엘리너 리콕, 윌리엄 턴불, 리처드 리 등)의 연구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전환하면서, 생산 형태도 여성의 노동(주로 채집)이 남성의 노동과 동등하게 중요한 형태에서 남성이 사회의 부를 대부분 생산하는 형태(경작과 목축)으로 전환됐다. 이런 생산 형태에서는 여성들이 하루 종일 무거운 쟁기를 끌거나 소를 모는 일은 임신을 하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사회적 잉여와 국가를 통제하는 일을 주로 남성이 맡게 됐다. 이와 함께, 종교적·법률적으로 통제되고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배타적인 가족이 발전했다.

오늘날의 여성 차별 역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의 삶을 포함해 사회 전반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가족을 자본주의적 착취와는 무관한 영역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주목할 뿐,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하는 구실을 주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족의 기능과 형태는 그 사회에서 생산이 이뤄지는 방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가족과 자본주의의 가족은 완전히 다르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가족은 변모해 왔다.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 방식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가족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뤄지지만,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책임은 개별 가족에게 맡겨져 있다. 노동력 재생산은 자본 축적에 필수적이지만,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는 그에 따른 부담을 최대한 개별 가족에게 떠넘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만약 가족이 이 부담을 떠맡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은 가족의 사회화에 대한 투자 수준을 엄청나게 늘려야 할 것이다.

가족은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한다. 가족제도는 여성이 열등하다거나 집안일은 여성의 숙명이라는 보수적 관념을 강화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위해 온갖 부당한 조건을 감내하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 방식은 경제적·이데올로기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기여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여성을 전업주부로만 남겨두지 않고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길 원한다. 자본주의 국가가 제한적이나마 양육 지원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본가 계급은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를 지속적으로 하진 않는다. 더욱이 지금처럼 장기적이고 심각한 경제 위기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도 공격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족은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는 주요 제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성차별을 철폐하려면 여성차별을 구조적으로 영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만 한다.

여성 차별은 남성의 이익인가

그런데 자본주의가 여성억압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남성이 가족 내에서 권력을 누리고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은 사실이라고 여긴다. 바로 이 때문에 남성들이 현상 유지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남성은 대체로 여성보다 집안일을 덜 하고, 어떤 남성들은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남성 권력’ 이론의 직접적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배계급 남성과 노동계급 남성은 똑같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들의 삶은커녕 자신의 삶조차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돈을 잘 못 버는 남성은 가족 안에서도 무시당하곤 한다. 노동계급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여성을 지배하는 실질적 힘의 원천이 아니라, 소외의 뒤틀린 표현이다.

물론, 가족 내에서 존재하는 성별 분업을 보면 남성이 여성의 희생에서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대다수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는 주로 여성이 맡고 있다. 맞벌이일 때조차 그렇다.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지’라는 남성들의 차별적 사고는 이런 불평등에 어느 정도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남성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객관적 이해관계는 구분해야 한다.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보다 가사노동을 덜 함으로써 약간의 이득은 얻겠지만, 그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사사화된 재생산 방식을 고수해야만 할 정도의 막대한 이득은 못 된다. 여성이 주로 육아와 가사의 책임을 맡는 현실의 이면에는 남성 노동자가 생계를 더 많이 부양해야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남성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과 직장 이동시간은 여성보다 길다. 게다가 여성의 가사노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 드는 시간이다. 여성이 가정 내에서 하는 육아는 남편 개인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제공하는 것이다.

시야를 가족 내부로만 돌리지 않고 체제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하의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이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가 대대적으로 가사 노동과 육아를 책임지고 개별 가정의 여성과 남성이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이것은 남녀 노동계급 모두에게 이익이다. 즉, 남성과 여성 노동계급은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에 공통의 객관적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이론은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가부장제 이론을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여성해방에서 자본주의 폐지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의 핵심적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남녀 노동계급이 여성 억압의 뿌리인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존재 이유인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힘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세력은 노동계급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노동계급의 현 상태를 용인하고 추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내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적 언행이나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경향에 도전해야만 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억압받는 모든 집단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을 지지해 왔고, 노동계급의 중심성 개념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작업장 쟁점뿐 아니라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서도 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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