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확대에 대한 대중의 바람은 크다. 그래서 박근혜조차 선거기간에 위선적이게도 “아버지의 꿈”을 운운하며 복지를 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복지 실현 방안은 한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의 하나이다.

복지국가 관련 논의는 그동안 주로 “생산적 복지”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논자들이 해 왔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공회 씨가(이하 존칭 생략) 《진보평론》 올가을 호에 ‘복지국가와 조세 ─ 그 계급적 성격과 정치경제학’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김공회는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도구로 ‘복지국가와 조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피케티를 비판하는 등 유익한 분석을 제공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논문에서는 부자뿐 아니라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는 것이 옳다는 보편 증세론과, 복지국가를 확대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주장을 담았다. 마르크스주의로 주류 개혁주의적인 정책을 제안한 것이다.

김공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복지국가는 보수성과 함께 진보성도 가질 수 있다. 보수적인 측면은 자본가들도 복지국가를 통해 노동력 재생산을 훨씬 더 안정적으로 하고, 개별 자본가들이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에 반해, 복지국가를 통해 국가가 소비 영역에 직접 개입하고 해당 품목의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면 국가는 진보적일 수 있다. 이를 통해 산업을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기본적으로 김공회는 증세를 해도 임금이 삭감되지 않는다고 보지만, 설사 임금이 줄어들더라도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사멸시켜 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증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의 전제다. 그 전제에 따라 개혁주의자들은 자본가들에 대한 증세뿐 아니라 노동계급에 대한 증세도 진보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공회가 지지한다는 마르크스 《자본론》의 생각과는 명백히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2권에서 “정부가 광산·철도 등에 생산적 임금노동자를 고용해서 산업자본가의 기능을 하는 경우에는 국가자본도 … 개별 자본의 총합에 포함”시켰다. 또한 엥겔스는 비스마르크가 독일 철도 체계를 국유화한 조처를 거론하며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형태가 어떻든 간에 근대 국가는 본질이 자본주의의 장치, 즉 자본가들의 국가로,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의인화다. 근대 국가가 생산력을 더 많이 장악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국가자본가가 되며, 그만큼 더 많은 주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악화한다.”(《사회주의 : 공상에서 과학으로》)

곧,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바뀐다 해도 근본적인 생산관계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동역학은 바뀌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잉여가치가 필요하다. 현대 국가는 잉여가치 획득을 위해 사적 자본가의 착취가 필요할 뿐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를 착취할 필요도 있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자본주의 외부의 존재로 보거나, 자본가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 모두로부터 중립적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국가의 본질

이런 상황에서는 자본주의를 개혁·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일부 선출직에 진출하더라도 국가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래서 20세기 중엽 대규모 국유화가 이뤄진 상태에서 서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거나, 옛 소련에서 전면적인 국유 경제가 등장했을지라도 결국 이윤을 위한 노동자 착취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극복은 결코 자본주의적 국가를 점차 확대하는 것을 통해 이룰 수 없다. 이론으로든 경험으로든 이런 생각이 지지받을 수는 없다.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노동계급은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 형태가 다른 자신의 국가 기구를 새로 세워야 한다.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지점에서 김공회는 복지국가의 진보성(국가 개입)이라고 지적한 것이 보수성(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연관돼 있을 뿐 아니라, 그에 종속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복지국가가 자본가들의 필요도 반영한 것이라는 점 때문에 복지국가를 통한 사회 개혁은 자본주의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1950~60년대 자본주의의 호황기 때 자본가들은 안정적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복지국가를 필요로 했지만, 1970년대 이후 이윤율이 떨어지자 자본가들은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복지국가의 재편을 시도해 왔다. 특히,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외주화·사유화를 강화하며 시장 원리를 도입하고, 연금을 삭감하고, 노동력 재생산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더욱 열악한 사람들에 대한 지출을 줄이는 시도를 해 왔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시기에 벌어진 복지 공격은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상대로 벌이는 계급투쟁, 임금 삭감을 위한 계급투쟁이었다.

김공회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 즉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이다. 김공회는 복지를 둘러싼 갈등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복지를 통해 이득을 보는 자본과 손해를 보는 자본 사이의 분파 투쟁으로 파악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임금을 “노동력의 재생산비”이되 하나의 고정된 값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공회는 노동자가 내는 세금이 늘더라도 임금이 줄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가 받는 명목임금에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다 노동자가 내는 세금이 더해진 것이므로 노동자 증세는 자연스럽게 명목임금 인상으로 이어질 뿐이지, 실질임금에서는 손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국가가 복지를 줄이거나 공공요금을 올리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지급해야 하는 자본가들의 임금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지, 노동자들의 손실은 없다고 본다.

추상적 사고

그러나 김공회는 경제적 논의를 위해 필요한 추상적 규정을 현실 투쟁을 설명하는 데 그대로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추상적 사고를 더 밀어붙임으로써 마르크스의 임금 이론을 데이비드 리카도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임금철칙설’과 비슷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력 재생산비”로 정의하고, 분석상의 필요를 위해 특정 시기 특정 지역(또는 나라)에서 임금은 하나의 고정된 값으로 간주된다고 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결정되는 데에 역사적·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준다고도 지적했다. 이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결정에 노동력 시장의 상황뿐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 비용 자체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는 것을 함의한 것이다.(계급투쟁이 노동력 재생산비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지면 제약상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임금, 가격, 이윤》에서 임금 인상 투쟁을 거부하는 존 웨스턴을 비판하면서 자본가들이 임금 인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위해 단결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인상·유지하기 위해서나,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 김공회는 이 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 증세와 복지 삭감을 막으려는 노동자 투쟁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가(자본주의 국가다!) 확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로 논점을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확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상이한 부문의 자본가들의 필요만 반영된 것이 아니라 웬만큼 살아 보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져온 결실이기도 하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이 강력할 때는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더 유력한 것이다. 가령 1987~89년 노동자 투쟁을 통해 국민연금제도와 국가의료보험제도가 자리잡았다. 서구에서도 1930년대 중엽과 제2차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대규모 노동자 투쟁을 통해 복지 제도가 도입될 수 있었다.

복지 확대 요구는 노동계급과 평범한 대중의 삶의 필요가 반영되기 때문에, 부분적이나마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복지 삭감에 맞선 투쟁이 오늘날 계급투쟁의 핵심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연금 삭감 등 긴축에 맞서 수십 차례 총파업이 벌어진 그리스의 사례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투쟁이 확대돼 체제 변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확대되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 삶의 필요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세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힘을 만들어 간다는 전망을 보며 복지 확대를 위한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낼 필요가 있다는 김공회의 주장은 더욱 큰 약점이 생긴다. 이런 주장은 오히려 증세를 둘러싸고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계급투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자 증세를 일관되게 요구하며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는 것이 계급투쟁에 더 이로울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번 김공회의 글은 계급투쟁이란 관점은 빠진 채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자본주의를 바꾸겠다는 (공상적) 관점이 반영돼 있다. 그러다 보니 노동계급을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드러난다. 이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위로부터 개혁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적 정책 전문가가 가질 만한 태도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개혁주의적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는 120년 전 러시아에서 ‘합법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집단이, 독일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무기가 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