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반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 안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복지국가 모델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진보진영 내에서는 ‘스웨덴 모델’에 관심이 높아져 왔는데, 〈노동자 연대〉는 여섯 차례에 걸쳐 스웨덴 모델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기사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연재가 오늘날 한국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이번 주제는 글의 분량 때문에 두차례로 나눠 싣습니다.

① 스웨덴 복지국가는 건재한가?
② 스웨덴 모델 1- 살쮀바덴 협약과 계급타협 전략(1)
③ 스웨덴 모델 1- 살쮀바덴 협약과 계급타협 전략(2)
④ 스웨덴 모델 2 – 연대임금정책과 렌-마이드너 모델 : 누가 이익을 얻었나?
⑤ 스웨덴 모델 3 – 임노동자기금 : 살아있는 호랑이의 발톱을 하나씩 뽑을 수 있을까?
⑥ 스웨덴 사민당 – 누구의 정당인가?


‘스웨덴 모델’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바로 살쮀바덴 협약이다. “1938년의 살쮀바덴 협약을 통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1960년대 말까지 유지된 스웨덴 특유의 …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는 스웨덴 모델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신정완)

표1. 노동자 1천 명당 노동손실일수(출처 : 신정완,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사평 아카데미, 2012)
나라 1900 ~ 1913 1919 ~ 1938 1946 ~ 1976
스웨덴 1286 1440 43
영국 460 1066 213
프랑스 309 404 566
이탈리아 293 126 631
독일 489 875 31(서독)

살쮀바덴 협약은 1938년 스웨덴 노총(LO)과 스웨덴사용자연합(SAF)이 체결한 협약이다. 그 핵심 내용은 노사 중앙조직들이 임금 협상 구조를 중앙 집중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의 분쟁 조정권한을 대폭 강화해 파업이나 직장폐쇄 같은 쟁의를 억제한다. 비록 강제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협약이 끼친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주요 제조업 노동자들이 대부분 LO 산하에 조직돼 있고 소수의 재벌 가문이 스웨덴 경제 전체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표 1〉에서 보듯이 당시 스웨덴은 유럽 전체에서도 전투적 노동자 투쟁이 빈번하게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살쮀바덴 협약 체결 직후 그 빈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한국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그동안 기업별 노조 체계가 가진 약점들을 지적하며 산별노조나 지역노조 등을 건설하려 애써 왔다. 기업별 노조 체계 하에서는 소규모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기도 어렵고 정작 노조를 만들어도 고용주들이 무시하기 일쑤다. 경험이 일천하고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임금이나 단체협상에서도 불리한 처지에 놓이기 쉽다. 자본들 사이의 하청 구조 같은 위계체계 때문에 하위 기업주들의 임금 지불 능력이 낮고,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도 공세적으로 싸우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때로는 대공장(예컨대 현대차 등)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전체 노동자들의 이익을 저버리고 자기 노동조합의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 오히려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수많은 투사들이 실천으로 입증했듯이 이런 어려움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주에 맞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꾸로 산별노조나 지역노조 등이 오늘날 노동자 투쟁이 겪는 어려움을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다룰 스웨덴 노동자들의 경험은 이런 구조가 노동조합 관료의 통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에 보수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조합 구조보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좌파든 우파든) 싸우려 하지 않을 때 기층의 노동자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투쟁에 나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럼에도 공장이나 기업의 담장을 넘어 더 광범한 노조로 단결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특히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직자도 늘어나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스웨덴 LO처럼 민주노총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조건에 대해 사용자 대표단과 협상을 벌일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기업별 노조 체계의 약점이 많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국내의 많은 학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스웨덴의 살쮀바덴 협약이 노동조합의 힘을 키우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물론 살쮀바덴 협약이 스웨덴 모델의 ‘기둥’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단지 상층 중앙 교섭 구조의 이점 때문만은 아니다. 살쮀바덴 협약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이나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을 결정할 때 노동조합을 중요한 논의 파트너로 참가시키는 구실을 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든 노사 간의 합의가 그 실질적 시행 여부를 판가름하는 구실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살쮀바덴 협약은 (형식적으로는 정부가 배제돼 있지만)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사회적 합의’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훗날 스웨덴 모델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연대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실업정책)이 도입된 것이나, 연금·아동수당 등 보편적 복지제도들이 자리잡게 된 것도 개별 기업이나 산업을 뛰어넘는 합의 구조 덕분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스웨덴 모델의 기둥

그러나 당시 일관되게 상층 단일 교섭 구조를 추구한 것은 LO가 아니라 SAF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살쮀바덴 협약 이전에 스웨덴에서는 노동자들의 전투적 행동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살쮀바덴 협약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신광영 교수는 “살트셰바덴[살쮀바덴] 협약은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통해 양자가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정합게임의 가능성을 인정한 긍정적인 계급타협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실제 협약의 내용은 사용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안재흥)

스웨덴 자본가들은 당시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위였던 금속노조가 사용자 측(VF)과 체결하던 단일 교섭 구조를 본떠 스웨덴 전체에 적용하려 애썼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권한이 강할수록 기층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제하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업을 불사하는 전투적 교섭 방식에 바탕을 두고 높은 임금을 획득해 온 건설 부문 노동자들의 존재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입장을 취해 온 금속노조 지도부의 노선을 정당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1926년 LO 총회에서 금속노조 스톡홀름 지부는 LO 전체 차원에서 ‘연대의 원칙에 기초한 임금정책’을 시행할 것을 LO 지도부에 건의했는데, 그 실제 의도는 건설부문의 높은 임금상승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신정완)

요컨대 노동계급 전체와 자본가 계급이 ‘상생’했다기보다는 노동조합 내 보수적인 부문 특히, 금속노조와 LO 등 상층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과정은 단순하지는 않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온건한 개혁주의 전략을 채택한 LO 지도부와 사민당이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서서히 압도해 가는 과정이 제2차세계대전 전까지 진행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전투적이었던 건설노조 등의 반발 때문에 LO 지도부는 1920년대까지도 이런 계급타협 전략을 노골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LO 지도부가 이미 1900년대부터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분명하다.

서유럽의 다른 선진국에서 대개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정당을 건설한 과정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사민당이 LO 건설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1898년에 창립한 LO는 수년 후 사민당과 형식적으로 분리됐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상층의 분업(당은 정치투쟁, 노조는 경제투쟁을 전담)에도 불구하고 기층의 조직은 거의 한몸이나 다름없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1900년대 이전부터 매우 온건했고, 1918년 가을에 사민당의 핵심 지도자 묄러가 당 이론지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혹독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현존 국가를 전복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시장의 문제를 바로잡으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심지어 이들은 ‘사회’라는 단어와 ‘국가’라는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사민당 지도부의 이런 노선은 LO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LO 지도부가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적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특히 당시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 덕분에 LO 내에서도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이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컨대 1902년에 사민당 지도부가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정치 파업을 제안하자, 이를 둘러싸고 LO 지도부 좌우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반면 사민당 당원(이자 LO 조합원)들은 압도적 찬성으로 이를 가결시키고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으로 선거권을 즉각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이틀 동안 벌어진 파업은 스웨덴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운수노조 위원장이던 찰스 린들리는 회고록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시에는 총파업으로 보통선거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거의 무한한 믿음이 있었다.”

이 파업을 계기로 스웨덴 자본가들은 SAF를 창설하고 직장폐쇄를 무기로 반격에 나섰다. 반면, LO 지도부는 정치 파업이 자본가들을 단결시키고 노조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여기며 기층의 행동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1904년에 다시 부쳐진 총파업 찬반 투표는 부결됐다. 당시 노동조합의 태도를 보며, 사민당 당원의 61.8퍼센트는 정치 파업에 나설 경우 노동조합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안재흥)

1906년 LO 지도부는 대규모 파업은 ‘최후의 투쟁수단’이며 ‘사용자 측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방어적 목적에만 사용돼야 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사민당 지도부도 이듬해 당대회를 열어 이 안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 LO는 SAF와의 협상에서 ‘노동의 자유’ 조항(실제로는 고용주에게 해고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1909년에 다시 총파업에 돌입했다. 1908년에 시작된 경제 위기 탓에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하락했다. 그래서 임금 인상이 핵심 요구였다. 7월에 벌어진 소규모 파업들에 자본가들이 직장폐쇄로 대응했고 LO 지도부는 기층의 압력에 떠밀려 총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LO 지도부는 산하 노조 지도부와의 상의도 없이 단지 총파업을 ‘선언’했을 뿐이었지만 해당 조합원 50만 명 중에 30만 명이 즉각 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파업은 처참하게 패배했고, LO의 조합원 수는 1년 만에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1909년 파업의 패배를 두고 기층의 과도한 전투성이 노조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당시 스웨덴에서도 1909년 파업의 패배 이후 LO 내 계급 협력 노선을 추구하는 우파의 입지가 강화됐다.

그러나 이 파업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의 경험을 비교 분석한 논문에서 스웨덴의 1909년 파업을 “관료적 대중파업의 극단적 사례”라고 평가한 바 있다.

“파업은 매우 단단히 위로부터 통제됐다. 지도부의 핵심 목표는 질서를 지키는 것이었다. 노조 사무총장은 파업 위원회가 ‘특별 경찰들’을 선발해 경찰의 지시에 성실하게 따르도록 지시했다. 이 아이디어는 내무부 장관이 노총 위원장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결과는 완벽한 질서였다. 심지어 당국은 평상시보다 파업 기간에 더 질서가 잘 지켜졌다고 발표할 수 있었다. 파업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파업은 한 달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임금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노조 지도자들은 ‘사실상 무조건 항복’했고 파업은 완전히 실패했다.”(토니 클리프, ‘대중파업의 패턴들’)

LO 지도부는 이 파업을 단지 정부 개입을 이끌어내려는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했다. LO 지도부는 정부 내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한하려 했지만 정작 자유주의자들은 이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LO 지도부는 무역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철도, 병원, 가스 수송, 청소 등 핵심 공공부문을 파업에서 제외시켰다. 가장 전투적이었던 항만노조는 1906년 LO 지도부의 ‘12월 합의’에 반발해 LO의 계획에 협조하지 않고 있었다.

요컨대, 기층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는커녕 파업의 ‘경제적 효과를 최소화’하려 한 LO 지도부의 자기제한적인 전술이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LO 지도부는 이 패배 이후 더욱 우경화했다.

그러나 스웨덴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1917년 무렵 LO의 조직률은 1909년 수준을 회복한다.

“1917년과 1918년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해였다. 식량 부족과 러시아 혁명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파업, 시위, 소요가 전국을 휩쓰는 와중에 보수주의자들이 보통선거권 요구를 받아들였고, 최초로 사민당이 내각에 참여했다. 사민당 내부에서 혁명에 동조하는 집단이 등장했고, 사민당 노선에 반대해 사회민주주의 좌파당을 건설했다. LO는 파업에 의존하지 않고 러시아 혁명의 효과로 자본가들과 정부로부터 중요한 사회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신광영)

혁명의 파고가 낮아지고 1920년대 대공황이 찾아오자 LO 지도부는 다시 자본가들과의 협력에 나선다. 이제 정부에 입각한 사민당은 노동자 파업에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집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다음 호에서 계속)


필자의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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