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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교훈

2001년 12월 19∼20일의 아르헨티나 봉기는 1990년대 내내 아르헨티나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저항의 폭발이었다.
실업자들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광범한 중간계급 등 다양한 사회 집단들의 누적된 분노가 거리에서 폭발했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약 40명이 죽고 2백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대통령 데 라 루아는 헬기를 타고 도망쳤고, 4주 동안 대통령이 네 명이나 바뀌어 아돌포 두알데의 임시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그런 대로 정치적 안정이 회복됐다.
그 봉기는 조직적 중심축이 없는 자생적 봉기였고, 봉기 직후 대중의 자기 조직 형태들이 대거 생겨났다.
공업 지대와 지방의 많은 공업 도시들에서 실업자들의 피케테로스 조직들이 급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부 곳곳에서는 민중의회들이 등장했다. 50명에서 1백 명씩 모인 이 의회들은 매주 ‘민중의회들의 의회’를 열어 도시 전체에 필요한 조처들을 조정했다.
그런 기구들을 중심으로 일련의 시위들이 조직됐고 위기 극복에 필요한 일상적 기능들이 수행됐다.
피케테로스 조직들은 버려진 땅에서 곡물을 재배했고 공동으로 빵을 구웠으며 국가가 내놓은 수당을 분배했다.
또, 민중의회들이 설치한 물물교환 클럽들에서 사람들은 현금 없이도 일자리와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런 기구들은 기성 정당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포럼이기도 했다.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민의 40퍼센트가 민중의회를 미래의 국가 운영 모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전적인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와 달리 민중의회는 대표자들의 기구가 아니었다. 또, 매우 상이한 계급 기반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한데 모으는 기구였으며, 작업장에 기반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어쨌든 2001년과 2002년에 피케테로스 운동과 민중의회 운동은 국가의 활동들을 마비시킬 수 있었고 아르헨티나 자본가 계급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런 운동들 덕분에 새로운 사회 운영 방식이라는 유령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운동들은 조직 노동계급 부문을 투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결정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조직 노동자들은 일자리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업자들과 달리 전투적 행동들을 주저했다. 그 사이에 양대 노총을 지배하는 페론주의 관료들은 결국 두알데의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더 광범한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 실업자들은 생계를 꾸리는 데 필요한 수당(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을 얻기 위해 계속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두알데는 이런 수당의 일부를 이용해 피케테로스 일부 부문을 회유했고, 이런 식으로 그 자신의 네트워크들을 재건하려 애썼다.
정치적 안정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2003년 5월 또 다른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히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였다.
18개월 동안 독자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던 운동의 일부 부문은 결국 키르히너가 우파(특히 전 대통령 메넴)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기게 됐다.
양대 노총보다 더 좌파적으로 보이는 세번째 노총 CTA, 일부 피케테로스 조직들, ‘오월광장어머니회’[아르헨티나의 ‘민가협’]의 일부, 그리고 다른 민권운동 단체들이 키르히너 취임식에 참석해 그를 축하했다.
그들이 보기에 “키르히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좌파적인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차베스와 겨룰 만하고, ‘반란’의 이미지는 룰라보다 더 강하다.”
키르히너 집권 후 정세와 관련해 아르헨티나 좌파 내에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 봉기는 이제 끝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느리긴 하지만 같은 리듬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1년 봉기로 아르헨티나 자본주의가 전복되거나 노동자·빈민·실업자 등에 대한 공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나마 질서를 회복한 키르히너 정부도 봉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만큼 자신감있는 것도 아니다.
키르히너 정부는 두 가지 압력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자신들의 힘을 맛본 대중의 압력과 아르헨티나 자본가 계급이나 IMF 등 국제 금융기구들의 압력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런 줄타기를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 키르히너가 공격을 재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결정적 패배를 당하지 않은 대중의 반격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많은 좌파는 대중의 자기 조직화 수준과 운동의 활기 덕분에 정치 조직이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향력 있는 좌파 지식인들이 홀로웨이와 네그리의 자율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자율주의 사상은 주요 피케테로스 조직들 가운데 하나인 ‘아니발 베론 조정위원회’[2001년 12월 투쟁 당시 경찰에 살해당한 실업자 아니발 베론의 이름을 따 만든 실업자들의 전국 조직] 안에서도 아주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안정은 다시 확립됐다(적어도 당분간은). 그래서 민중의회들은 없어졌고 피케테로스 조직들은 언론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으며, 페론주의와 연관된 일부 무장 집단들과 국가의 탄압이 심해지고 있다.
크리스 하먼은 운동들에서 정치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르헨티나 봉기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결정적인 문제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득세하는가다.
운동들을 단결시키고 확대하는 전략을 가진 혁명가들이 가장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개량주의가 득세할 것이다.
운동들을 그저 찬양하기만 하거나 운동에서 정당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상식’에 거의 도전하지 않는 사상들이 득세하도록 보장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