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신문 - 러시아 볼셰비키 정당의 신문 〈프라우다〉
〈노동자 연대〉 구독
러시아의 독재자 짜르 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볼셰비키는 불법으로 신문과 잡지를 제작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문과 잡지를 배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1912년 4월 합법 일간지
1년에 1만 1천 개, 즉 하루 평균 35개의 기사가 노동자들의 소식 보고와 편지였다. 볼셰비키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 편지들은 공장과 작업장, 병영과 공장 지대의 일상 생활을 알려 주었다. 점증하며 끓어오르던 저항들을 이 편지들보다 더 잘 보여 준 것은 없었다. 이 저항들은 나중에 위대한 혁명으로 폭발했다.
이런 점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외 지역에서 신문 배포가 아주 어려웠다. 그러나 신문은 계속 발행됐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불법 정당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린 신문의 절반이 공장에서 팔렸다. 신문을 판매하는 활동가들은 불법 정당의 지지자들을 조직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신문을 위해 하루에 1코페이카
레닌은 1902년에 이렇게 썼다. 혁명적 신문은 “건설중인 건물의 비계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신문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은 심각한 혁명의 퇴조기에 당의 깃발·위신·연속성을 유지하는 것부터 전국적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일까지 모든 일에 언제나 대비할 것이다.”
이 말은
레닌은 혁명적 신문이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폭로하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모든 면을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짜르 국가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야 했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상이한 계급의 구실을 설명해야 했으며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들을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시켜야 했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러시아 인근의 크라코프 ― 폴란드 영토로 당시 독일이 통치하던 지역 ― 로 옮겨 갔다. 이로써 그는 신문을 직접 지도하고 수백 편의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이 기사들은 모두 보통의 노동자들을 겨냥해 쉽고 분명한 언어로 씌어졌다.
짜르 체제에 맞선 반란은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중단됐다. 당국이 비판에 재갈을 물렸고
볼셰비키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은 가중됐고 러시아 국가에 반대하는 운동은 훨씬 더 커졌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가 전복되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소비에트로 알려진 매우 민주적인 노동자평의회들이 작업장과 군대에서 등장했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황이 형성됐다.
레닌은 혁명의 우여곡절을 겪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