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우다〉(“진실”이라는 뜻)는 제1차세계대전 직전까지 러시아를 휩쓴 대규모 격변의 핵심적인 일부였다. 그 신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전진시키는 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프라우다〉는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혁명적 분파의 신문이었다. 볼셰비키 정당의 지도자 레닌이 이 운동의 주요 인사였다.

러시아의 독재자 짜르 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볼셰비키는 불법으로 신문과 잡지를 제작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문과 잡지를 배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1912년 4월 합법 일간지 〈프라우다〉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고립감을 느끼던 패배의 시기에 뒤이은 진전이었다.

〈프라우다〉가 출간된 것은 군대가 시베리아에서 파업중인 광부 5백 명을 학살한 직후였다. 이에 반발하는 투쟁의 물결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었다. 메이데이에는 노동자 40만 명이 파업을 벌였다.

〈프라우다〉는 이 새로운 부흥기의 전투성과 분노를 반영했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문의 많은 부분이 노동자들의 편지로 채워졌다.

1년에 1만 1천 개, 즉 하루 평균 35개의 기사가 노동자들의 소식 보고와 편지였다. 볼셰비키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 편지들은 공장과 작업장, 병영과 공장 지대의 일상 생활을 알려 주었다. 점증하며 끓어오르던 저항들을 이 편지들보다 더 잘 보여 준 것은 없었다. 이 저항들은 나중에 위대한 혁명으로 폭발했다. 〈프라우다〉는 근로 대중의 위대한 교사가 됐고, 신문에 주로 기고한 사람들도 노동자 자신들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프라우다〉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하루에 4만 부가 팔렸다.

〈프라우다〉는 검열과 탄압에 시달렸다. 짜르 당국은 〈프라우다〉의 사무실을 덮쳐서 신문을 압수하고 벌금을 물리고 편집자들을 체포하고 신문 판매원들을 협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외 지역에서 신문 배포가 아주 어려웠다. 그러나 신문은 계속 발행됐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불법 정당이었다. 〈프라우다〉를 이용해 볼셰비키는 신문과 교신하고 신문을 배포하고 작업장에서 기부금을 모으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린 신문의 절반이 공장에서 팔렸다. 신문을 판매하는 활동가들은 불법 정당의 지지자들을 조직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신문을 위해 하루에 1코페이카[kopec, 러시아의 소액 화폐 단위]씩 적립했다. 이런 모금이 당에 돈을 기부하는 방식이 됐다.

〈프라우다〉에 대한 지지 수준은 1913년 신문에 돈을 기부한 노동자 단체가 2천1백81개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신문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들의 재정 지원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닌은 1902년에 이렇게 썼다. 혁명적 신문은 “건설중인 건물의 비계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신문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은 심각한 혁명의 퇴조기에 당의 깃발·위신·연속성을 유지하는 것부터 전국적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일까지 모든 일에 언제나 대비할 것이다.”

이 말은 〈프라우다〉에 딱 들어맞았다. 〈프라우다〉는 단순히 노동자들의 경험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변혁 투쟁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도 했던 것이다.

레닌은 혁명적 신문이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폭로하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모든 면을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짜르 국가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야 했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상이한 계급의 구실을 설명해야 했으며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들을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시켜야 했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러시아 인근의 크라코프 ― 폴란드 영토로 당시 독일이 통치하던 지역 ― 로 옮겨 갔다. 이로써 그는 신문을 직접 지도하고 수백 편의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이 기사들은 모두 보통의 노동자들을 겨냥해 쉽고 분명한 언어로 씌어졌다.

짜르 체제에 맞선 반란은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중단됐다. 당국이 비판에 재갈을 물렸고 〈프라우다〉는 폐간됐다.

볼셰비키는 〈프라우다〉를 통해 확보한 네트워크를 이용해 전쟁을 비판하는 불법 신문을 러시아 전역에 배포했다.

전쟁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은 가중됐고 러시아 국가에 반대하는 운동은 훨씬 더 커졌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가 전복되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프라우다〉는 복간될 수 있었다.

소비에트로 알려진 매우 민주적인 노동자평의회들이 작업장과 군대에서 등장했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황이 형성됐다.

[대중의] 급진화 덕분에 볼셰비키 정당이 엄청나게 성장하던 7월에 〈프라우다〉는 하루 9만 부씩 팔렸다.

레닌은 혁명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프라우다〉를 이용해 볼셰비키 당원들을 지도했다. 〈프라우다〉는 러시아의 남녀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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