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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한다: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노동운동을 향하여

2016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 경제 상황이 지난해보다도 더 나빠지리라는 점을 의심할 사람은 낙천적인 희망적 관측가가 아닌 한 거의 없을 것 같다. 특히 중국 경제가 더한층 불안정해지고 있다(1월 4일치 일간지에 따르면, 중국 증시 폭락으로 거래 완전 중단). 중국 노동자 운동도 더욱 투쟁적이 되고 있다(‘중국 노동쟁의가 급증하고 있다’, 〈노동자 연대〉 164호 ).

“한반도 주변”(동아시아) 정세도 더한층 긴장되고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는 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움직임의 결과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상황 전개를 북한과 중국이 반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북한은 최근 중국보다 러시아에 더 우호적인 외교를 시행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 냉전시대처럼 대륙세력 vs 해양세력 하는 식으로 세력 ‘균형’이 이뤄지고 있지 않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균형이 형성되지 못하고(형성돼도 단기간일 뿐) 오히려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중국과 달리 러시아가 유럽(크림반도)과 중동(시리아)에도 개입하기 시작해, 단지 동북아시아 차원이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듯한 상황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는 2008년 경제 공황 이래로 그동안 꾸준히 나빠져 온 이 지역의 불안정을 더욱 악화시킬 요인인 것이다.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불안정 속에서 박근혜 정부가 시행할 정책들도 더 사악해지면 사악해졌지, ‘인간적인 얼굴’로 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노동자 계급에 대한 ‘노동개혁’ 공격은 총론에 해당할 입법 단계부터 각론에 해당할 시행 단계까지 노동자 운동에 첩첩산중일 것이다. 이런 일들에 맞서 노동자 운동은 그동안 좌파적 활동가들을 노조 집행부 직책에 선출해 오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특히, 지난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등장은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금속노조를 비롯한 다양한 민주노총 산하 조직들의 선거 결과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듯이, 많은 좌파적 활동가들이 좌파적 집행부에 실망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 과정은 불균등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오른팔과 왼팔 격이라는 현대차와 기아차 노조들의 지난해 가을 선거 결과는 전임 집행부보다는 조금 더 좌파적인 듯한 집행부가 선출됐음을 보여 준다. 현대중공업에도 좌파적 노조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전체로 보아 노조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채 여전히 우산 구실을 그들에게 기대하는 형태로 지속될 것 같다. 지도자들이 우산을 씌워 주면 투쟁에 나설 용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식 말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노동자 계급의 자력 해방을 추구하는 종류의 좌파)은 올해도 노동자 운동에의 개입을 완강하게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개입은 단지 경제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에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 함은 특정 부문이나 산업, 지역, 기업 등에 시야가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또 기존 국가권력(을 파트너로 삼는 게 아니라 그것)과 전면적 충돌을 염두에 두는 접근법을 뜻한다.

그리고 국제주의자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사회’란 ‘국가(national) 사회’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제국주의 시스템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적 노동운동’을 건설하려 애쓴다 함은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노동운동을 건설하려 애쓰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 나라 노동운동은 그러지 못했다. 반미 민중주의 노동운동이 한편에 있고, 급진적 반자본(반자본주의와는 구별된다) 노동조합 운동이 다른 한편에 있는 식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미국으로 환원될 수 없다(‘장기적 전쟁과 그에 맞서서’ 참조). 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분리시켜, 반제국주의는 당장에 중요하지만, 반자본주의는 그다음 단계에서나 착수할 과제라는 식으로 단계론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또, 노동운동이 민중운동 안에 용해돼서도 안 된다. 즉, 노동계급이 나머지 민중을 견인해야지, 노동계급이 민중의 요구와 정서와 투쟁 방법에 적응하는 민중주의여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독자적 요구와 투쟁 방법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

한편, 반자본과 반자본주의는 다소 다르다. ‘자본’이란 추상적 범주로, 현실에선 다수의 개별 자본들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에 대항한 투쟁은 현실에선 흔히 개별 자본에 대항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총자본’이라고 강조한다 해도,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차원을 넘어 구체적 지칭체를 가리키려면, 엥겔스가 ‘이상적인(가장 알맞은) 집합적 자본가’라고 부른 국가를 의미하기 십상이다. 반면 ‘반자본주의’는 이윤을 핵심 동력과 동기로 삼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동안 노동운동 내 ‘좌파’는 제국주의 문제를 경시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노동조합의 정치적 한계나 약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단결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노동조합 운동이 ‘민중의 호민관’ 노릇을 하는 식으로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져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이원성과 이분법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그 방향은 반제국주의적인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인 노동자계급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과제가 순식간에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공상이리라. 하지만 무한정 먼 미래로 미뤄 두는 것도 변증법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미래의 집을 지금 지을 수는 없어도 미래의 집을 위한 주춧돌 놓기와 벽돌 쌓기는 시작할 수 있다.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 사회적 위기가 노동자들과 보통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계속, 또한 더한층 짓누를 게 뻔한 2016년, 저항을 효율화하고 보편화하기 위해 이 과제에 착수하자. 사회주의자에겐 쟁취해야 할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