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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상표 평전 - 부조리에 대항한 시민과학자》:
촛불을 들고 끝까지 부조리에 대항해 온 삶

임은경, 공존, 304쪽, 18,000원

박상표 평전이 출간됐다. 굳이 그의 이름 앞에 ‘촛불’ 장식을 달지 않아도 2008년 촛불항쟁의 중심에 있던 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노동자연대와도 인연이 적지 않은 그였기에 평전으로 찾아온 그가 반가우면서도 서글프다(그는 〈레프트21〉(〈노동자 연대〉의 옛 이름)의 칼럼니스트였다). 그래서 사실 책을 사놓고도 한동안 손이 가지 않았다. 아마 서평을 청탁받지 않았다면 평생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친숙한 것’과 ‘아는 것’은 달랐다.

미처 몰랐던 박상표의 과거

그는 196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그의 꿈은 미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과 학과 결정은 고3 담임의 몫이던 시절,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문학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거리와 공장에서 진정한 서사를 발견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끝까지 남았던 학생들 가운데 박상표가 있었다. 그는 군대를 갔다 온 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소련 붕괴 이후 노동 현장에 들어갔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오던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분히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며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엘란트라’ 문짝을 찍어내며 남은 시간을 쪼개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잠을 4~5시간 자면 2시간 30분~3시간 30분의 여유 시간이 생긴다”며 그 “여유 시간”에 그람시와 마르크스를 공부했다. 공장에서 허리를 다치면서 노동 현장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의 학습과 경험은 그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상표 선생 박상표 선생은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진실을 파헤치며 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미진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박상표는 복학 후 고적 답사를 통해 심신을 달랬다. 당시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붐을 일으키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유홍준의 책을 안내서 삼아 따라다니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모든 사료를 스스로 다시 찾고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했다. 그가 고적 답사 분야에서 유명해지자 서울대 학보를 통해 유홍준과의 서면 대화가 이뤄졌는데, 그는 “1980년대의 ‘이념’의 자리를 ‘문화’가 대신 차지한 것은 아닌가, 1980년대의 치열했던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사회 정의와 진보보다는 자신만의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는 그 어디쯤에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며 날을 세웠다. 그는 역사를 탐구하면서도 지배자들의 기록이 아닌 피지배자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정리하고자 했다. ‘신토불이’ 같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굶주린 민초들의 삶이 녹아 있는 ‘김치의 역사’를 쓰고, 전태일을 되새기고 자본가들의 탐욕을 비판하며 ‘미싱의 역사’를 썼다.

역사 문제만이 아니라 박상표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모든 문제에서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견지했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지켰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답사를 이끌 때에도 유언을 따른다며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었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에서 상근활동까지 하면서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지킨 그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북한체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은 명확히 구분했다. 수의사로서 평생 ‘동물복지’를 고민한 그였지만 채식주의나 생태주의에는 선을 그었다.

촛불의 심지, 박상표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박상표는 2008년 촛불항쟁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애당초 광우병 전문가였다는 게 결코 아니다. 누구보다 엄밀하게 과학적 진실을 추구했고, 이를 자신의 출세가 아닌 민중을 위해 쓰고자 했던 그는, 자본의 탐욕이 부추긴 동물병인 광우병이라는 사안을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수의사이자 역사가인 그가 민중의 건강을 위협하고 한미FTA라는 치욕스런 역사와 맞물린 사안을 방관할 리 없었다.

맑시즘2008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상표 선생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던 과학자 ⓒ이윤선

그 시작은 2008년이 아닌 20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 협상에서 4대 선결 조건 중 하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였는데, 이 가운데 앨라바마에서 발생한 광우병 소의 ‘나이 판정’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한미 간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에서 1998년 이후에 태어난 소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수입을 중단하기로 미국과 한국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6년에 발견된 이 소의 나이가 8살 이하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재개될 수 없었다. 이때 홀연 ‘내 나이 묻지 마! 미친 소 그냥 먹어?’라는 기사로(〈오마이뉴스〉 2006년 6월 1일) 정말 혜성처럼 박상표가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정말 반갑기는 하지만 흔히 있는 ‘반짝 의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2006년부터 2008년 촛불항쟁을 지나 문제가 거의 마무리 된 2011년 말까지 거의 5년 동안, 그는 초인적으로 싸웠다. 강연, 토론회, 캠페인, 집회, 연설, 기자회견, 인터뷰, 법정싸움을 다 소화하면서도 정부와 관변학자들이 내놓는 주장을 단 한 건도 놓치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로 대응했다.

촛불정국이 끝난 뒤에도 그는 끊임없이 거대 자본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찾아나섰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첫 영리병원 승인도 사실 그 덕분에 이제야(?) 이뤄질 수 있었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투자활성화 대책의 핵심 사안으로 중국계 싼얼병원을 첫 영리병원으로 허용하려 했다. 이를 마치 예견이나 한 듯 그는 죽기 직전 싼얼병원의 부실함을 폭로한 문건을 발표했다. 결국 싼얼병원의 사업계획은 국제적 망신을 당하며 한 달 만에 전면 취소됐다.

어떤 한계에도 굴하지 않던 아름다운 삶

그가 죽고 얼마 안 돼 나는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를 정리한 적이 있다. 분명 며칠 전까지 썼을 컴퓨터일 텐데 5분이 지나도 부팅이 되지 않았다. 고장난 줄 알고 하드를 뽑으려는데 그제야 작동이 됐다. 사양을 확인해보니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후진 컴퓨터였다. 전 세계 광우병 자료를 찾아 분석해 매일 메일을 보내 “자료대마왕”이라고 불리던 그의 고물 컴퓨터 앞에서 나는 한참 고개를 떨궜다.

나는 박상표가 어떤 한계를 구실로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작은 방과 고물 컴퓨터 한 대밖에 없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국제적이고, 과학적이고, 헌신적으로 노동자·민중을 위해 싸웠다. 그는 꿈대로 미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분명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잠시나마 책을 통해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답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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