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건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상태 문제와 소련 사회의 성격 문제였다. 당시 세계경제 상황은 위기가 아니라 장기 호황의 초기 국면인 듯했다.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달라진다는 것은 당면 정치 전망과 전술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소련 문제의 경우, 소련을 노동자 국가(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국가로 보는 사람(팔레스타인 출신 토니 클리프)도 나왔다. 소련을 자본주의의 한 변형으로 본다 함은 사회주의 정치와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크게 달라지게 됨을 뜻한다. 원리·원칙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1947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 문제와 당면 세계경제 상황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서로 논쟁을 벌인 건 1938년 트로츠키가 작성한 제4인터내셔널 창립 선언문과 관련 문서들에 담긴 예측이 크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세계 자본주의가 회복 불능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는 극한점에 도달했고 옛 지배계급의 해체도 마찬가지다. 이런 체제는 더는 존속이 불가능하다.”

이런 천지개벽적 전망으로부터 트로츠키는 개혁주의자들의 입지가 없다는 전망도 이끌어 냈다. 개혁주의 정당들은 자기 지지자들에게 개혁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므로 약화되고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말이다.(그런데 트로츠키가 말한 개혁주의 정당에는 공산당도 포함됐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장기적 추세를 지적한 것으로는 옳은 통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추세가 실제로 현실화되는 데는 적어도 20년이 걸렸다.)

트로츠키는 또한 소련 관료를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소비에 기생하는 불안정한 기생 계층으로 봤으므로, 회복 불능의 위기 상황에 세계대전마저 겹치면 소련 관료는 전쟁을 겪고 나서, 아니 어쩌면 전쟁 중에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1947년의 시점에서 보건대 자본주의 경제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고, 소련은 정치혁명으로 관료가 타도되는 상황을 겪기는커녕 동유럽을 장악해 그 지역의 사회를 급속히 소련 사회처럼 변모시키고 있었다. 소련이 만약 노동자 국가라면 소련은 동유럽의 자본주의 사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진보한 사회로 변모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즉, 스탈린주의는 진보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산당과 별개로 독자적 운동을 건설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기되는 이런 당혹스런 질문들에 직면해 심지어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 지도자 제임스 P 캐넌은 트로츠키의 예측이 현실화되지 않은 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라는 황당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트로츠키의 천지개벽적 전망이 조장한 메시아적 기대는 전환적 강령(‘이행기 강령’)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집착에 잘 나타난다. 트로츠키 자신은 그러지 않았지만,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강령 자체나 요구 자체에 무슨 마술적 힘이나 있는 양 착각하는 모습을 흔히 보였다. 그 바람에 그들은 노동계급 의식의 실제 변화와 계급 세력관계의 실제 변화를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때때로 전술들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이런 ‘이행기 강령’ 집착은 어떤 운동의 혁명적 잠재력이 현실화되느냐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마치 ‘이행기 강령’이 있느냐 여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우리 나라 급진 좌파 가운데도 이런 개인이나 단체가 있었다).

1940년대에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트로츠키의 이론을 비판으로부터 면제시키려 애쓰는 바람에 트로츠키의 이론을 교리로 만들어 버리고, 또 천지개벽 같은 사회 변혁을 학수고대한 점에서 마치 종말론적 종교 종파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그들이 처한 극도의 역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찍이 1930년대부터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적대(흔히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집회를 물리적으로 공격했다)와 국가 탄압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매우 강력했던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공산당, 국민당,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1930년대는 그 시기 중엽에 일어난 미국 노동자 투쟁을 제외하면 패배의 시기였다. 트로츠키 사망 직전쯤 나치는 대서양 연안에서 소련과의 국경선에 이르는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잇따른 패배는 스탈린 체제의 지배력을 강화해 줬다. 파시스트들의 전진에 직면한 노동자들의 눈에는 소련이 자신들의 유일한 보루인 듯했다.

또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거의 다 소규모여서 객관적 상황이 그들에게 강요한 요구를 전혀 감당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독일 상황이 그랬다. 독일 파시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저술들은 그의 전체 저술들 가운데 단연 최상의 것으로, 파시즘의 동역학에 대한 기막힌 분석과 함께 히틀러를 패퇴시킬 명료한 전술과 전략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에게는 그 전술과 전략을 실행할 수단이 없었다. 1930년대 초 독일의 트로츠키주의 단체는 겨우 600명밖에 안 됐다. 그들은 활동적 당원이 각각 수만 명이 있는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치단체가 상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분열이 일어나기 쉽다. 분석이나 정책의 차이를 실천적 검증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분열이 뭐 대수인가. 게다가 트로츠키주의 단체는 거의 다 노동자 운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데다 그나마 있는 회원들의 상당수가 지식인 지망자로 개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이었다. 특히, 이론을 반박 불가능한 교리로 탈바꿈시키는 태도 때문에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분열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화됐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소그룹들은 자신만이 창립 문서들에 대한 진정한 해석자임을 자처했다. 이렇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역경에 처한 종교적 소종파들이 분열을 거듭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트로츠키 사후 정설파들은 이렇게 저마다 제4인터내셔널 재건을 자처하거나 아예 제4인터내셔널 자체를 표방하면서 수많은 소그룹들로 분열해 가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이제는 별반 공통점도 남아 있지 않은 상이한 조직들을 무원칙하게 기회주의적으로 결속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매우 경직된 교리주의를 고수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포용하며 실상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설명 방식으로 너무도 신축성 있게 변모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정설주의자들이 그랬다.

가령 정설파들은 1989~1991년 스탈린주의 체제 붕괴 후 그 사건을 1938년 트로츠키의 기이한 분석과 조화시키려 했다. 1938년 트로츠키는 소련 관료가 세계 자본가계급의 도구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정설파들은 1991년 이후 소련 관료가 스스로 민간 자본가들로 변신하기로 한 일을 무려 51년 전 트로츠키의 관측, 그것도 잘못된 관측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당면하고도 긴박한 현실로서 소련 관료의 매판화를 얘기한 것이고, 이는 소련 관료 체제의 이례적이고 일시적이며 기생적인 성격을 강조한 그의 견해와 일치한다.

정설파들은 다른 여러 이론적 절충도 시도했다. 그 가운데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콘드라티예프의 50~60년 주기 경기변동설, 즉 장기파동론과 절충한 경제위기론을 개발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기초인 이윤율 중심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위기론을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다(트로츠키 자신은 콘드라티예프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1

정설파의 모순

트로츠키 정설파의 모순은 트로츠키의 문자에 집착하느라 그의 사상에서 정수를 누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했다. 그러나 동유럽 나라들이 기형적이어도 노동자 국가라면 노동계급이 아닌 세력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런 대리주의(다른 사회세력이 노동계급을 대체하기)로 이끌렸다. 물론 자신들은 노동계급을 대체할 세력이 못 되므로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세력에 희망을 걸었다. 그래서 정설파는 공산당에 장기 입당하는 정책을 (그 정책 집행이 가능한 나라에서) 채택했다.

그러나 최대의 유혹은 제3세계 혁명들로부터 왔다. 1949년 중국, 1959년 쿠바, 1975년 베트남 등지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사회 해방 강령이 아니라 민족 해방 강령에 따라 농민 게릴라를 지도해 승리를 거뒀다. 이 사건들은 얼핏 보면 연속혁명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속혁명론은 후진국이 제국주의를 패퇴시키려면 후진국의 노동계급이 민족해방운동을 이끌고 자본주의와 단절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설파들은 이 사건들이 오히려 연속혁명론의 타당성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2 이 혁명들로 민족 자주화와 토지 개혁 또는 토지 국유화가 성취됐으니 이 혁명들은 노동계급의 지도로 수행됐음이 틀림없다는 식이었다. 연속혁명론이 수정돼야 한다는 생각은 이 경우에도 선험적으로 배제됐다. 군부 권위주의 통치 치하의 한국 같은 경우에도 연속혁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민주적 권리들을 쟁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989년 초까지 에르네스트 만델 지지자였던 필자도 이렇게 믿었다).

중국·쿠바·베트남 등지의 혁명들의 성격을 사회주의적이라고 규정하면 트로츠키의 정설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새로운 난점들을 들여오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우선, 이 혁명들의 주체가 노동계급이 아니었을 뿐더러 혁명을 지도한 정당도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이 아니었다.

정설파들은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혁명을 지도한 정당들이 비록 노동계급 기반은 없었을지라도,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에 충실하고 노동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함으로써, 노동계급을 정치적·강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운동이 그 성원 가운데 노동자들이 거의 없고 노동계급의 일상 투쟁에 동참하지 않아도 노동계급적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회세력이 노동계급을 대체하기가 노골적으로 정당화되는데, 그 운동들의 이데올로기가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라면, 우리는 그 다른 사회세력이 노동계급을 대체하는 정도에 아예 할 말을 잊게 된다. 도대체 혁명에 역행하는 운동이라고 트로츠키가 규정했던 스탈린주의 운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타도 혁명을 이끌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설파들의 답변인즉슨, 스탈린주의자들이 운동을 지도했어도 그들은 객관적 상황의 논리에 의해 운동을 스탈린주의적으로 이끌지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의 지도부가 사회주의 혁명을 자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지만 그때그때의 상황에 실용적으로 대처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실용적인 혁명 지도부가 주요 제3세계 지역에서 자본주의를 제거할 수 있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있어서 뭘 하나?’

이 질문은 중국 혁명이 성공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지만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이 성공하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첨예하게 제기됐다. 미국의 정설파인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니카라과 혁명을 환영하면서, 이 혁명이 연속혁명이 아니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또 덧붙이기를,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니카라과와 쿠바를 중심으로 한 새 인터내셔널 설립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도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트로츠키주의 정면 부정은 제4인터내셔널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사례는 1940년대 후반 이래 끊임없이 스탈린주의 쪽으로 이동하고픈 유혹을 느껴 온 정설주의의 논리적 결과였을 뿐이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든 제4인터내셔널 주류(만델이 이끌었다)든 둘 다 노동계급 혁명이 노동계급의 능동적 참가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이 혁명들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그들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 없이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트로츠키주의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제4인터내셔널 지도부도 아니고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도 아닌 정설파 가운데는 중국·쿠바·베트남뿐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시리아·앙골라·모잠비크·에티오피아 등의 국가들도 기형적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하는 분파가 있었다. 테드 그랜트(1913~2006)가 이끌던 영국 밀리턴트 그룹(1964~1991년)이 그들이었는데, 그들은 국유 경제를 노동자 국가의 기준으로 삼는 점에서 그 나름으로 일관성 있는 정설주의 입장이었다.

대안 ─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비록 트로츠키가 소련 사회 성격 문제에서 국유화를 노동자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해 그의 아류들이 다른 사회세력이 노동계급을 대체하기로 가는 길을 다소 열어 줬지만, 그 자신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계급 자력 해방 사상, 즉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사상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정설파들이 스탈린주의 쪽으로 이동하는 듯하는 것에 반발한 이단자들 가운데엔 스탈린주의 공포증 또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증오로 부를 수 있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1940년 트로츠키와 결별한 미국의 맥스 샥트먼이 이후 보인 행보가 이런 것이었다.3 샥트먼은 1960년대에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지경으로까지 미끄러지고 굴러떨어졌다. 샥트먼을 보면 북한이나 친북 좌익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가 지나쳐 남한 국가를 지지하기로 한 일부 옛 PD계 출신 인사들(조승수 씨 같은 우파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생각날 것이다.

박노자 같은 사람들은 필자와 같은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을 샥트먼의 아류로 봤는지 몰라도 우리 전통의 창시자 토니 클리프는 정설주의도 스탈린주의 공포증도 아닌 길을 밟았다. 그 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탁월한 저작들에 근거해 소련 정치경제 비판이라고 할 만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측면은 소극적 측면으로, 국유화를 노동자 국가와 같은 것으로 본 트로츠키 분석의 오류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 측면은 소련 노동자들이 노동자 권력은커녕 노동자 권리조차 없는 현실을 소상하게 들춰낸다. 또, 공장과 직장 안에서 경영자의 독재적 권력에 종속된 현실과, 이 현실이 소비가 생산에 종속된 사회 현실의 일부라는 점, 또 만연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등도 들춰낸다. 소련 사회의 이런 특징들을 알면 소련을 퇴보했어도 모종의 노동자 국가라거나 왜곡됐어도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묘사하기가 실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만 갖고는 소련이 계급사회라는 점만을 확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종류의 계급사회인가? 클리프 국가자본주의론의 둘째 측면은 소련이 자본주의적 계급사회라는 걸 확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자본들’이라는 구체적 개념을 구분했다. 일반적인 ‘자본’은 자본가가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직접적 노동과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자본은 여러 자본들로서, 또 오직 그렇게만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경쟁하는 기업들 간에 필연적으로 분열돼 있다. 바로 이 경쟁 때문에 자본들은 생산을 확대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즉,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자본들은 축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축적을 국가가 전면적으로 지배한다면 어찌 될까? 샥트먼은 그런 상황을 시장과 경쟁의 제거로 봤고, 따라서 개개의 생산 단위들이 자본으로서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봤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종식으로 본 것이다. 샥트먼은 이런 사회형태를 자본주의도 노동자 국가도 아닌 ‘관료적 집산주의’라고 불렀다(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소련을 ‘포스트자본주의’ 사회라고 모호하게 부른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는 전혀 다르게 봤다. 소련을 나머지 세계로부터 떼어 내어 고립적으로 고찰하면 안 되고 세계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 속에 자리매김하고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경쟁 압력이 작용한다. 이 압력은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군사적 경쟁은 시장이 내는 효과와 똑같은 효과를 낸다. 즉, 군사적 경쟁 때문에 소련 관료는 중공업과 무기 생산 부문을 우선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생산에 비해 소비가 후순위로 밀리는 형태의 자본축적이다. 이런 일은 제1차 5개년 계획의 원년인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때가 레닌이 “관료적으로 기형이 된 노동자 국가”라고 부른 사회가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클리프는 전 세계적 경쟁의 효과들을 소련에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것의 필요조건으로 다룸으로써, ‘포스트자본주의’라는 모호한 소련 사회론을 해체하고 그 진정한 성격을 규정할 수 있었다.4 물론 클리프의 이론은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에서 영감을 얻었다. 부하린은 자본축적이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나아가는 추세와 함께, 국가와 민간 자본이 통합되는 (국가자본주의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추세도 수반함을 지적했다. 그러면 중심적 경쟁은 일국 내부보다는 세계 체제 내부로 전이된다.5 그럼으로써 민간 기업들 간의 시장 경쟁은 국가들 간의 군사적 경쟁에 비해 후순위로 밀려 경쟁의 형태가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스탈린 치하 소련의 산업화는 노동자 국가의 경제적 강화로 여겨지기보다는 중무장한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전반적 추세의 극단적 형태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이 추세는 1930년대 대불황으로 가속돼 마침내 또다시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옛 소련과 현 북한·중국이 ‘왜곡됐어도 사회주의 사회’이므로 서방과 남한보다 낫다는 견해와 ‘세습 족벌 독재’이므로 서방과 남한보다 못하다는 견해, 이 두 견해가 각각 함축하는 나쁜 정치적 실천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전자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밀어붙이면 북한의 권력 대물림과 핵무기를 지지하게 되고,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간 전쟁이 일어나면(국지적 대리전일지라도) 중국 제국주의 편을 들어 노동자 운동과 좌파를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들 것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니면, 우리가 익히 알듯이 기껏해야 주류 사회민주주의나 최악의 경우 뉴라이트로까지 나아가게 될 수도 있다.

반면 국가자본주의론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제국주의 편도 안 들고 또 (남북한 중) 아무 분단국 편도 안 들게 해 주면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과 국제적인 노동자 국가 연방을 향해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옛 소련과 현 북한·중국이 기형의 사회주의가 아니고 자본주의의 한 변형이라는 국가자본주의론은,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그람시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옹호할 수 있게 도와준다.


  1. Trotsky, Leon. 1923, “The Curve of Capitalist Development”(A Letter to the Editors in Place of the Promised Article),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23/04/capdevel.htm

  2. 가령 뢰비, 미셀. 1990, 《연속혁명 전략의 이론과 실제》, 신평론.

  3. Shachtman, Max. 1940, “The Soviet Union and the World War”, New International, Vol 6 No 3., pp 68~72. https://www.marxists.org/archive/shachtma/1940/04/ussrwar.htm

  4. 다른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있긴 하다. 대표적인 것이 C L R 제임스와 라야 두나옙스카야가 발전시킨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자본주의를 생산과정으로 환원하는 바람에 소련형 사회를 일종의 초대형 공장으로 표상하고, 계급투쟁을 노동 현장에서의 반란으로 환원한다. 그리 되면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즘과 매우 비슷해지며, 혁명적 정치조직 건설을 기피하게 된다(우리 나라에도 이와 흡사한 사상에 따라 활동하다가 매우 사기 저하한 그룹들이 있다).

  5. Bukharin, Nikolai. 1982, Selected Writings on the State and the Transition to Socialism, Routledge,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