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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해 고동치는 심장

우리의 역사에서 위대한 날 가운데 하나가 1871년 3월 18일이다. 새벽 3시쯤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2백50문의 대포가 광장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대포들은 프랑스·독일 전쟁[보불전쟁]에서 사용됐었다. 전쟁 당시 파리는 겨울 내내 봉쇄돼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파리 시민들은 대부분 완패했다고 생각했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 파리에서는 선거로 강경 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그 정부의 수반은 칼 마르크스가 “괴물 같은 난쟁이 도깨비”라고 묘사한 아돌프 띠에르였다. 띠에르의 골칫거리는 파리였다.

파리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였고, 그들은 분노한 상태였다. 정부에 분노했고, 포위 당시 중단됐던 집세를 소급해 납부하라는 것에 분노했고, 자신들의 노동조건에 분노했다.

그리고 띠에르는 몽마르트의 대포들을 우려했다. 그 대포들을 몽마르트로 옮긴 과정은 아주 단순했다. 파리의 남녀 노동자들과 아이들이 대포들을 차지하고 몽마르트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교묘한 작전을 명령한 것은 국민방위군(National Guard) ― 파리에서 프로이센(독일) 군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창설된 자원병 군대 ― 이었다. 국민방위군의 중앙위원회는 정말로 민주적이었다.

그 대포들을 탈환하기 위해 정부군 병사들이 파병됐고, 그들이 남아서 대포들을 지키고 있었다. 몽마르트 주변 거리에서는 대포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 때 몽마르트로 올라가는 길에서 한 여성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이즈 미셸이었고, 마흔한 살이었다. 그녀는 대포를 지키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녀는 부상당한 병사를 간호하던 도중 한 장군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제 프랑스 군대가 파리를 맡게 됐다며 “대포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대포들을 가져간 더럽고 역겨운 오합지졸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다.” 하고 말했다.

루이즈 미셸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는 하녀의 딸이었다. 자라서 교사가 됐지만, 자신만의 수업 방식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몇몇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파리의 급진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금세 유명한 연설가가 됐다.

당시에는 독립적 사상을 가진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 엄청났다. 루이즈 미셸은 여성이 끼여들 때마다 터져나오는 어리석은 비웃음과 희롱을 참아야 했지만, 이럭저럭 운동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칼 마르크스 등이 건설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직역하면 국제남성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다함께], 여성이 가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루이즈 미셸은 또 국민방위군에도 가입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국민방위군은 완전히 남성들로만 구성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그 장군의 말을 듣고 곧장 언덕에서 뛰어내려오며 외쳤다.

“반역 음모가 진행중입니다”, “우리가 장악한 곳을 군대가 탈환하려 합니다”, “우리의 대포를 저들이 빼앗아가려 합니다”, “우리가 나서서 이 일을 막아야 합니다.”

그녀는 모든 교회에서 종을 울리라고 명령했다.

불쌍한 병사들이 아직도 대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장군들은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그 때 갑자기 루이즈 미셸이 이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녀는 대부분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 약 2백 명을 이끌고 와서 언덕 위의 무장한 병사 3천 명과 대치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뛰어올라갔다. 언덕 위에는 군대가 전투 대형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죽기를 각오했다. 그 모든 여성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장군은 휘하 병사들에게 세 번이나 발포를 명령했다. 병사들은 세 번 다 발포를 거부했다. 갑자기 하사관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통쾌한 장면이었다. 군중이 병사들을 껴안고 와인을 함께 나누는 멋진 장면이었다.

그러나 아돌프 띠에르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정부 기구 전체를 이끌고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사유로 옮겨갔다. 그리고 파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3월 18일 밤에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파리의 정부를 선포했다. 그리고 즉시 중앙위원회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는 곧장 베르사유에 있는 군대로 행진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베르사유로 가면, 정부를 쓸어버리고 프랑스의 모든 도시에서 노동자들을 봉기시킬 수 있습니다.”

중앙위원이 아니었던 루이즈 미셸은 회의장 밖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우리는 베르사유로 진군해야 합니다 ― 지금 당장.”

그러나 중앙위원의 다수는 합법적 방법을 선택했다. 그들은 선출된 기구에 [통치권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리 되면 그 기구가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3월 26일에 선거가 실시됐다. 국민방위군은 이런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러분에게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여러분과 같은 고통을 겪는, 여러분 자신들 중에서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갑자기 출세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야심가들을 믿지 마십시오. 또, 말을 실천하지 않는 공론가들도 믿지 마십시오. 재산이 너무 많은 사람들도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자신의 형제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선거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리고 선출된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작가가 “붉은 공화파”(Red Republicans)라고 부른 사람들이었다.

그 선거는 여느 선거와 사뭇 달랐다. 정책 결정자들은 정부에서 일하는 단순한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부의 결정들을 집행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언제 우리가 경찰 수뇌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노동자 판사들, 노동자 신문 소유주들을 본 적이 있는가? 파리 코뮌은 이런 일을 이뤄 냈다.

파리 코뮌은 겨우 두 달 동안 존속했다 ― 그것도 대부분 베르사유 군대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두 달은 요즘 같으면 의회에서 한 법안이 두 차례 독회를 하는 기간이다.[영국 하원에서는 법안이 제출되면 각 법안마다 3차례의 독회를 거친다.]

그러나 코뮌은 소급 적용된 집세를 폐지하고 강제 퇴거를 금지했다. 전당포는 노동자들한테서 받은 물건들을 모두 돌려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과점의 야간 노동은 금지됐다. 코뮌은 프랑스 최초로 노동자들을 위한 상해보험을 시행했다.

파리의 교육은 수녀들과 수도사들의 손을 떠나 보통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 코뮌은 그들에게 공상이 아니라 사실에 집중하고 “아이들이 겪는 가장 큰 병폐 ― 따분함 ―”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하는 놀라운 포고령을 내렸다.

문화적 분위기는 정말 놀라웠다. 모든 교회가 토론 장소로 사용됐다.

그러나 코뮌은 완벽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과 달리, 코뮌은 지역별로 선출됐다. 선출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선출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약점의 결과 하나는 코뮌의 전쟁 수행 방식에서 드러났다.

띠에르가 베르사유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끊임없는 포격이 파리 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전쟁 지휘권이 옛 군장교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들은 코뮌이 대표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베르사유 군대가 파리 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성문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의 상징인 몽마르트의 대포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보통선거로 선출됐지만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고 썼다. 그럼에도 코뮌 시기 여성들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보통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계급[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았으며 그 권력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코뮌을 위해 싸웠다. 루이즈 미셸은 코뮌을 방어하려는 1백20명의 여성 부대를 이끌었다.

이제 이야기의 끝을 맺어 보자. 전체 전쟁 기간에, 즉 4월 2일부터 5월 25일까지 베르사유 군대 8백87명이 전투 도중 사망했다.

베르사유 군대가 파리를 완전히 탈환한 5월 25일 이후 열흘 동안 파리에서 2만 5천 명이 붙잡혀 총살당했다.

어떤 식으로든 국민방위군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 남자든 여자든 아이들이든 ― 모조리 살해당했다.

루이즈 미셸은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도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지는 않았다. 그녀는 식민지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와서 또다시 투옥됐다.

그녀는 결코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1905년 러시아 혁명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춤을 추다가 다시 누워 이렇게 말했다. “옳거니 ―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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