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축구 경기장에서 96명이 압사당한 사건으로 영국판 ‘세월호 참사’라 불린다. 축구장이 붕괴한 것도, 총기 난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96명이나 사망한 것은 순전히 경찰이 관중을 한 곳으로 무리하게 입장시켜서 생긴 일이었다. 희생자 중 60명은 25세 이하였고 그중 37명은 청소년이었다.

최근 영국 법원은 힐즈버러 참사의 원인이 술 취한 관중 탓이 아니라 당일 현장을 지휘한 경찰에 있다고 판결했다. 유가족들이 27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온 진실이 마침내 인정받았다.

영국판 ‘가만히 있으라’

참사 당일, 힐즈버러 축구 경기장에서는 FA컵 준결승전이 예정돼 있었다. 관중석의 해당 구역이 이미 포화 상태였는데도 경찰은 계속 관중들을 그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영국 축구 경기장의 관중석은 하층부가 입석이었고, 축구장 내 난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내부 이동이 어렵도록 설계됐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경찰이 허용하는 곳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출입구의 폭은 고작 77 센티미터였고, 어두워서 앞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현장을 지휘한 경관은 경기 전에 사람들을 최대한 입장시키려고 회전문까지 개방하는 통에 입장 줄이 밀리는데도 계속 우겨 넣었다.(그러나 참사 직후 경찰은 관중들이 억지로 문을 열어젖혔다고 거짓말했다.) 안쪽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압사 직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라운드 쪽 관중들은 뒤에서 밀려드는 관중 때문에,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구분하는 철망에 눌려 질식사했다.

심지어 경찰은 압사 공포를 느낀 관중들이 철망을 오르거나 다른 구역으로 벗어나려 하자 이를 제지하며 도로 아수라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야말로 영국판 ‘가만히 있으라’였다. 실제로 당일 현장을 지휘한 경관은 훗날 “우리는 관중들의 경기장 난입을 막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하고 진술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경찰이 당일 경기장 통제소에서 지휘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사람들이 관중석을 필사적으로 벗어나자 경기 진행은 어려워졌고 경찰은 결국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관중의 이동을 막는 데 치중했다. 심지어 경찰은 구호에 나서려고 입석 구역을 벗어나려던 관중을 구속하겠다고 위협했다. 구급차 44대가 경기장으로 왔지만 경찰은 오직 한 대만 경기장에 들여 보냈다. 인근 병원에서는 환자들의 규모를 예상하지 못해 이송된 환자도 제대로 처치를 받지 못하는 일이 속출했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만 받았어도 희생자 중 절반가량(41명)은 살 수 있었다고 2012년의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는 결론 내렸다. 정부가 ‘긴급 상황’을 선포하지 않아서 잃은 목숨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예고된 참사

힐즈버러 경기장은 월드컵 8강전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경기장 중 하나였지만 안전 관리는 형편없었다. 참사 전인 1981년, 1987년, 1988년에도 관중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경기장 하층부를 입석으로 운영하면서 입장 인원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수단도 구비돼 있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안전 규정 위반이었지만 경기장을 운영하는 구단 측은 비용상의 이유로 이를 무시했다.

당시 힐즈버러를 관할한 시 공무원은 안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참사 3년 전에 안전 사항을 지적하자 경기장 운영자들은 격노하며 운영을 방해하면 시당국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권력자들은 국민보다 자신의 수족(경찰)을 더 지키려 했다

세월호 참사에서처럼 영국에서도 구조에는 무능한 경찰이 은폐에는 신속했다.

경찰은 참사 발생 2시간 만에 경찰 사진 팀에게 경기장 주변 쓰레기통을 뒤져 술병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다. ‘술 취한 훌리건들이 무리하게 입장한 탓’으로 몰아가려고 작정한 것이다. 경찰은 10살 아이는 물론 사망자들에게서까지 혈액을 채취해 음주 측정을 했고 사망자 96명에게 전과 기록이 있는지 뒤졌다.

참사 나흘 만에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보수 신문 〈선〉은 ‘힐즈버러의 진실’이라는 1면 헤드라인으로 술 취한 관중들이 억지로 출입문을 열어 기어이 사고를 냈다는 경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사를 실었다. 생존자들이 “쓰러진 관중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오줌을 갈기고, 인공호흡을 하는 경찰들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고 날조했다. 무질서한 대중이라는 편견을 조성하려는 시도였다.

힐즈버러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우리는 훌리건이 아니고, 참사의 책임은 바로 경찰에게 있다’ 하고 거듭 항변했다. 한 유가족은 “숨진 아이 아빠가 술 취한 훌리건이 아니라 한 가정의 건실한 가장이었음을 믿어 달라” 하고 울부짖었다.

후속 조사 과정에서 경찰 고위층은 당일 현장에 있던 경관들의 진술을 일일이 확인하며 “그런 진술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진상조사위원회에 제출하기 전에 다시 숙고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경찰 한 명은 당일 비번이라 관중으로 경기장에 있었는데, 그는 주변 경찰들이 “내 입에 자신들의 말을 우겨 넣으려 했다”며 진술 강요를 폭로했다. 또한 경찰은 생존자들을 취조하면서 작성한 진술서를 당사자에게 보여 주지도 않고 서명하라고 윽박질렀다. 당시 작성된 ‘생존자 증언’이 수십 년 뒤 공개되자 당사자들이 자기가 한 말과 다르다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생존자와 희생자들을 매정하게 비난하며 경찰을 감쌌다. 참사가 벌어진 힐즈버러를 관할한 남요크셔 경찰이 1984~85년 광원 파업 당시 ‘오그레이브 전투’에 투입돼 파업을 파괴하는 데 주된 공을 세운 바 있기 때문이다. 남요크셔 경찰청장 피터 라이트는 5년 전 ‘오그레이브 전투’를 지휘한 장본인이었다.

보수당 정치인은 TV에 나와서 책임을 희생자들 탓으로 몰아갔다. 또한 경찰에 불리한 증언을 삭제하도록 진상조사위원회에 압력을 넣었다. 보수당 정부가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는 1989~90년에 걸쳐 활동했지만 많은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경찰과 경기장 운영진을 질책하긴 했지만 어떠한 징계도, 고발 조처도 뒤따르지 않았다. 당일 현장 책임자는 징계 없이 조기 퇴직했고, 경찰 두둔에 앞장서고 진상조사를 훼방한 보수당 정치인과 경찰 간부는 훗날 기사 작위를 받았다.

노동당도 은폐에 가담하다

1997년 노동당은 18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 냈다. 그러나 노동당의 집권은 노동자 투쟁이 전진하면서 이뤄냈다기보다 노동당이 우경화해서 지배자들의 환심을 산 덕분이었다. 영국 보수 정치의 거물이자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은 1997년 선거에서 노동당을 후원했고, 이런 우경화를 이끈 노동당 총리 토니 블레어(사진)는 선거 후 머독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代父)가 됐다.

노동당은 머독의 치부인 힐즈버러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노동당 의원 앤디 번햄은 총리 시절의 블레어가 ‘루퍼트 머독을 건드리게 되니까 힐즈버러 사건을 파고 들지 마라’ 하고 직접 지침을 내렸다고 (2015년에야) 폭로했다.

노동당 집권 후 만들어진 새로운 진상조사위원회의 결론은 대처 정권 하의 진상조사위원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찰이 진술을 조작했다’는 숱한 증언도 인정하지 않았다.

참사가 벌어진 지 21년, 노동당 집권 12년이 지난 2009년이 돼서야 노동당 정부는 진실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의 압력을 받아 수사자료를 공개하라고 남요크셔 경찰청에 지시했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유가족은 이번 재판 결과를 환영하면서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사 당시 현장을 지휘한 경찰이나, 진상조사를 방해한 경찰 고위층은 아무런 징계도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이다. 참사로 당시 17살이었던 동생을 잃은 슈테판 그레엄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재판은 우리가 그동안 투쟁해 온 것이 정당했음을 완전히 입증했습니다.

“저는 줄곧 관중들이 경찰의 과실치사로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인정받아서 정말 기쁩니다. 특히 ‘관중들은 이번 참사에 조금도 책임이 없다’고 판사가 분명히 밝힌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죄없는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희생자 96명을 위한 정의를 찾으려는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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