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산업은행에 제공해 주기 위해 이른바 한국형 양적완화를 추진하겠다고 하자 지배계급 내에서 갈등과 논란이 일고 있다. 주된 논란은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산업은행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두고 과연 양적완화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쟁점은 이런 정책을 뭐라 부르든 간에 과연 효과가 있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이 다양한 자산 매입을 통해 시중에 직접 통화 공급을 늘리는 정책이다. 양적완화는 기준금리를 조절해 간접적으로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하는 기존의 정책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비관행적(unconventional)’ 통화 정책이라 불린다.

인쇄기에서 돈을 마구 찍어낸들 경제가 근본으로 회복되는 건 아니다. ⓒ사진 출처 한국조폐공사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주요국 정부들이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내렸음에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중앙은행이 직접 국채나 회사채를 매입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으로, 2009년 3월 처음 시작된 양적완화는 2015년 12월에 종료됐다. 그 사이에 네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로 시중에 풀린 돈은 4조 5천억 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이 정책은 미국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양적완화는 ‘아베노믹스’로 불렸는데, 그 정책도 실패했다. 아베 정부는 2013년 4월부터 엔화 가치 하락과 수출 증대를 위해 통화량을 늘려 국채를 연간 50조 엔 규모로 매입했고, 2014년 10월에는 국채 매입 규모를 연간 80조 엔으로 확대했다. 그럼에도 일본 경제는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통화량을 늘렸음에도 물가상승률을 2퍼센트로 끌어올리지도 못했다.

케인스주의와 중앙은행

세계 대불황이 시작되던 1930년에 쓴 《화폐론》에서 케인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중앙은행이 대출 비용을 낮추고 투자를 위한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비관행적 통화 정책’이라고 부른 정책으로 개입해야 한다. 금리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케인스는 국채를 매입하고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들이 단기 금리를 낮추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즉, 중앙은행이 은행 체계에 ‘유동성’ 투입을 증대시키고 그래서 민간 은행과 기업들의 ‘자신감’을 높여 준다면 투자를 증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08년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었고 양적완화를 추진했던 벤 버냉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콜롬비아대학교의 마이클 우드포드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은행 체계를 이용해 시장 금리를 적절히 조정할 수 있다면 투자율이 우리의 기대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에서 이 처방이 도출됐다.”

케인스와 우드포드, 버냉키는 옳았는가? 양적완화가 은행체계에 ‘유동성’을 증대시켜 ‘자신감과 기대’를 높였고, 그래서 투자가 ‘우리의 기대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에 부합하도록 증대했으며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던가?

분명 그렇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1990년대에 이런 조처들을 채택해 투자와 경제성장을 회복시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영국 중앙은행, 일본 중앙은행 등이 양적완화 정책을 채택했지만 실패했다. 가장 최근에는 유럽중앙은행이 은행에 막대한 현금을 제공해 채권과 주식 같은 ‘고수익’ 자산에 대한 투기를 조장했고, 심지어 거대 비금융기업들이 현금 축장을 하도록 부추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기업 투자와 경제성장은 2008년의 대불황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화폐 이론에 따르면, 화폐는 지불수단, 가치척도, 가치저장(축장) 수단 등의 구실을 한다. 경제가 불황이나 공황일 때 자본가들은 수중에 있는 화폐를 투자하지 않고 보유하게 된다. 이윤이 매우 낮다면 투자의 기회비용인 금리를 이전보다 더 낮추더라도 축장된 화폐를 투자로 유인할 수 없다. 케인스는 이런 상태를 ‘유동성 함정’이라고 불렀다.

소를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이지는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중앙은행이 국채나 회사채를 매입함으로써 시중에 많은 돈을 투입하더라도 투자는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마르크스가 화폐수량설을 비판했을 때의 핵심 쟁점도 바로 이 점이었다.

마르크스는 화폐량이 상품가격을 결정한다는 화폐수량설을 이렇게 비판했다. “상품가격은 유통수단의 양에 의해 결정되며, 유통수단의 양은 또한 한 나라에 존재하는 화폐재료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환상은 그 최초의 주창자들이 채택한 엉터리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상품은 가격을 가지지 않고 유통 과정에 들어가며, 또 화폐도 가치를 가지지 않고 유통 과정에 들어가, 거기에서 잡다한 상품 집단의 일정한 부분이 귀금속 더미의 일정한 부분과 교환된다는 가설 말이다.”

투자수익률

케인스는 양적완화가 은행과 기업들에 현금을 제공하거나, 채권의 장기 수익률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를 불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불황이 시작된 지 5년이 넘게 지난 1936년 케인스는 ‘비관행적 통화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케인스는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재정 지출과 국가의 경제 개입을 주장하게 됐다.

양적완화 정책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을까? 케인스는 투자를 결정짓는 요인은 투자수익률에 대한 예상과 이에 대한 자신감이지 금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의 상태는 실천적 인간이 가장 세심하게 그리고 가장 근심스럽게 관심을 두는 문제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주의 깊게 분석하지 않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특히 자신감이 경제적 문제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 자본의 한계효율성에 대한 예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 투자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자본의 한계 효율성에 대한 예상과 자신감의 상태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감의 상태는 투자의 한계효율성에 대한 예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관련이 있다.”

그래서 투자수익률(케인스가 ‘자본의 한계효율’이라고 부른 것)이 매우 낮은 경우에는 금리가 낮고 시중에 많은 유동성이 공급돼도 사태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금리에 영향을 미치는 단순한 통화 정책의 성공에 어느 정도는 회의적”이었던 케인스는 《일반이론》에서는, 실패한 기업 투자를 보완하거나 펌프질할 재정 지출과 국가 개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많은 케인스주의자들은 양적완화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양적완화는 경제가 더욱 후퇴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경제를 회복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마이너스 금리와 ‘헬리콥터 화폐’(헬리콥터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는 것에 비유됨)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돈이 거저 1백만 원 생겨도 바로 소비할지 아니면 나중을 위해 저축할지 또는 빚을 갚는 데 사용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헬리콥터 화폐’가 수요를 진작시키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 효과적일지는 분명하지 않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주장한 이론과 대책은 고전적 케인스주의(또는 구(舊)케인스주의)라고 불린다. 1970년대에 고전적 케인스주의가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데 실패하면서 신케인스주의(New Keynesian) 경제학이 등장했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하버드대학교의 그레고리 맨큐 같은 신케인스주의자들은 케인스가 효과가 없다고 비판했던 통화정책의 효율성 문제로 되돌아갔다. 고전적 케인스주의가 정부 재정지출 확대 같은 정책을 추구한다면 신케인스주의자들은 금리 정책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고전적 케인스주의나 신 케인스주의나 모두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미국 연준이 2015년 12월 금리를 소폭이나마 인상함으로써 미국에서 양적완화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