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174호 온라인에 실린 관련기사를 다시 쓰다시피 개정하고 대폭 증보한 것이다. 기본 논조의 차이는 없다.


한 여성의 어처구니없는 피살로 많은 여성들이 충격에 빠졌다. 이 여성은 이 나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역 상가 근처 공중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남성에게 살해됐다. 친구들과의 만남 중간에 잠시 화장실에 갔을 뿐, 이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딸을 먼저 보낸 그의 부모와 연인을 잃은 그의 남자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많은 여성들이 이 살인으로 충격받아, ‘나도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며 불안해 하는 듯하다. 게다가 여성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 반면 여성차별은 여전한 현실에 대해 여성들은 분노하고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구직시장과 노동세계에서 체계적으로 차별받을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비하도 광범하게 벌어진다. 이런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반감이 이번 사건을 ‘나도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사건’으로 여기게 되는 배경인 듯하다.

그럼에도 심정과 인상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는 사회를 계급 지배가 아니라 남성 지배 사회로 본다. 계급 분단보다는 성의 분단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배계급 여성도 지배계급 내에서 차별받는다. CEO나 국가 관료, 국회의원과 같은 사회 고위층에서 여성의 비율이 매우 적은 것이 이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지배계급 여성이 받는 차별은 노동자 계급 여성이 받는 차별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지배계급 여성은 자신의 차별을 완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물질적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배계급 여성은 집안일을 노동자 계급 여성을 고용해 대신 하도록 만들 수 있다.

게다가 계급투쟁에서 어느 쪽에 서느냐는 문제가 있다. 지배계급 여성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득을 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의 편에 서기 어렵다. 새누리당 김을동은 같은 여성이지만 보통의 여성들을 깔보고 노동자 운동을 혐오하는 보수 우익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성이 아니라 계급으로 분열돼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단순한 ‘돈’이나 ‘화폐’가 아니라 ‘사회관계’로 이해했다. 이 관계의 진수는 첫째,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다. 이 관계에서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착취가 일어난다. 둘째,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다. 자본은 언제나 복수로 존재한다. 자본들의 관계는 경쟁이라는 형태를 띤다.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관계와, 이 두 가지 관계의 상호 연관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규정했다.

1. 남성 개개인은 남성 지배 사회의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하는 존재일 뿐인가?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들은 사회를 남성 지배 사회로 보고 남성 지배가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여성혐오’를 드러낸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범죄와 일탈을 포함한 남성 개인의 행동은 단지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표현된 것일 뿐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면 범죄나 비행을 저지른 개인이 특별히 어떤 상태나 처지,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주목할 이유는 없게 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을 해체시켜 버리고, 오로지 구조만 남기는 환원론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 사는 남성은 모두 ‘여성혐오자’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흉악한 살인 범죄도 남성이라면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살인 범죄는 누구나 저지르는 게 아니다. 살인은 “대표적인 격정범죄(crime of passion)다. 분을 못 이겨 저지르는 범죄라는 말이다.”(범죄 전문가 이창무) 개인적 특성(배경, 경험, 관계, 심리적 상태 등)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살인 피의자 김모 씨가 조현병에 따른 피해망상에 시달렸는지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지금으로선 확실치 않다. 신경정신의학회는 “아직 피의자의 충분한 정신감정이 이뤄지지 않[아,] 여성혐오나 조현병을 성급하게 원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된다"며 공식적 확인이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모 씨가 조현병이든 아니든, 그 점이 핵심적인 쟁점은 못 된다. 무차별적 살인은 아무나 저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의 근저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즉, 소외다. 소외는 외톨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중이 자기 주변 세계를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대중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로, 이들은 이 사회의 부를 만드는 주체이지만 사회를 통제할 권한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다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모를 한낱 부속품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자본주의적 소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정도는 다를지라도 하루하루 무기력과 열패감, 불안감을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특히 심각한 심리적·정신적 장애를 겪고 심성이 크게 뒤틀리게 될 수 있다. 때로는, 더 약한 상대라고 여겨지는 여성과 아동 등이 이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좌절감을 느끼거나 심리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외라는 사회적 원인 위에 개인의 특수한 문제들이 매개가 돼야 비로소 범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때로 흉악범죄로까지 말이다.

2. 여성혐오? ‘차별’과 ‘혐오’는 다르다

모든 살인은 혐오와 증오에서 비롯하므로, 피의자 김모 씨가 여성을 혐오 또는 증오했을 수 있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혐오 범죄’는 전혀 다른 얘기다. 혐오 범죄란 특정 사회집단이 열등하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편견에 따라 해당 집단을 배제하려는 동기로 저지르는 범죄다. 따라서 어떤 집단에 대한 개인의 증오심만으로 혐오 범죄를 규정할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해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 할지라도 사회 전반에 “여성혐오”가 퍼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성·좌파운동 내에서 ‘여성혐오’를 ‘여성차별’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러나 두 용어는 구분해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체계적인 차별이 사회에 존재한다. 가령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것, 가사와 육아 담당자로 여겨지는 것, 성희롱·성폭력에 시달리는 것, 여성비하와 성적 대상화, 차별적 발언 등은 여성이 여전히 차별받는 현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차별’이라는 말은 여성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 비하부터 제도와 구조, 공격적 행동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러나 ‘혐오’라는 말은 이런 것들과는 구분된다. 언어가 사회적 현실을 개념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여성혐오’는 ‘싫어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배제’, ‘배척’을 위한 말과 행동이다. 즉, 특정 집단이 모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취급해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무슬림들은 ‘테러’와 경제 위기, 일자리 부족 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배척당한다. 한국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사회를 위기에 빠뜨리고 ‘나라를 망친다’(근래 동원되는 논리는 ‘성소수자들이 세금 폭탄을 안긴다’는 헛소리다)는 감정적 거짓 선동으로 성소수자들을 사회에서 찍어내려 한다.

이렇게 보면, ‘혐오’는 단지 ‘차별’ 또는 ‘정도가 심한 차별’이 아니다. 혐오와 차별은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가령 자본가들은 노동자 전체를 혐오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굴러가려면 노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값싸게 부려먹고 노동자들을 서로 이간질하려고 ‘차별’은 해도, ‘혐오’는 할 수 없다. 반면, 좌파 혐오는 가능하다. 지배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사회 운영에 도전하는 좌파들은 사회에서 추방되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도 지배자들이 차별은 할 수 있을지언정 혐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의 절반을 어떻게 사회에서 배제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자본주의는 착취와 축적을 위해 여성들이 집 안팎에서 수행하는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박근혜 정부는 여성을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여성을 헐값에 집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그래서 여성을 차별할 수는 있어도 혐오할 수는 없다. ‘일베’ 같은 일부 우익적 개인들이 여성혐오자들일 수는 있어도, 여성혐오가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혐오 범죄는 특정 집단이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믿음에서 비롯해, 특정 집단을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벌이는 목적의식적 범죄다. 이 점에서 차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는 이것의 가장 극단적 사례였다. 성소수자 혐오에 맞선 투쟁이 강력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 층위가 다른 행위를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렸을 때 나타나는 효과가 있다. 특별히 위험한 행위가 가진 특수한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가령 성폭력 개념을 강간, 성추행뿐 아니라 성희롱, 차별적 발언, 심지어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동까지 지나친 광의로 확대했을 때 성폭력이 사소화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여성운동 내에서도 많이 지적되는 바다. 이처럼 혐오와 차별은 구분해서 써야 한다. 이는 여성들이 위축되지 않고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서도 더 효과적이다.

3. 도덕적 공황 조장에 반대해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을 보며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불안해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공중화장실에 가는 것이 괜히 겁나고, 매일 다니던 밤거리도 무섭게 느껴지고, 낯선 남자를 괜히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거나 갈수록 늘고 있다며 도덕적 공황을 조장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 대검찰청의 ‘2015범죄분석’을 보면, 피해자 다수가 여성이라고 보고된 ‘강력(흉악) 범죄’[1] 발생율(인구 10만 명당 범죄 발생 건수)은 66.5건이고, 그중에서 살인은 2.7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이는 10년 전에 견줘 소폭 감소한 수치다.

‘강력 범죄’에서 성폭력의 비중(87.5퍼센트)이 높다 보니, 피해자 다수(88.7퍼센트)가 여성이라고 보고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살인의 경우에는 남성 피해자(511명)가 여성(404명)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2] 다른 강력범죄의 경우, 강도 피해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소폭 많고, 방화의 경우에는 남성 피해자가 더 많다.

범죄의 피해 정도를 놓고 보면, 강력범죄로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는 남녀 간 차이가 크지 않고, 상해에 이른 경우는 여성이 남성보다 두배가량 많다. 그러나 강력범죄로 사망하거나 다치는 여성의 절대 수와 남성 대비 비율은 각각 줄어드는 추세이거나 큰 변화는 없다.

폭행 범죄의 피해자의 경우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가량 더 많고 실제 피해상황(상해, 사망)도 두배가량 많다.

공식 통계상 강력 범죄와 강력 범죄의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도되는 것은 성폭력 통계 수치가 늘었기 때문이다. 다른 강력범죄(살인, 강도, 방화)의 경우는 건수 자체가 10년 전에 견줘 꾸준히 감소 추세이거나 변함이 없지만, 성폭력 수치는 크게 늘었다. 그러나 성폭력은 신고율이 너무 낮아서 공식 통계 증가가 실제 범죄 발생 증가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런 통계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별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흉악범죄의 피해를 무시해도 되고 별로 끔찍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다. 흉악범죄는 항상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끔찍한 비극이다. 특히, 잘 신고되지 않는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경우에는 명백한 여성차별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흉악범죄에 노출돼 있다거나 흉악범죄가 최근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 공황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언론의 선정주의일 뿐이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이번 범죄에 책임도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많거나 적게 여성차별적 관념을 받아들이긴 해도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는 극소수다.

물론 흉악범죄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범죄인 살인은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범죄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살인범 가운데 남성은 77.4%에 불과(?)하다. 여성 살인범이 22.6%나 된다. 전체 범죄의 80% 이상을 남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감안하면, 살인은 대단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살인 피해자의 성별을 살펴보면 더 놀랍다. 살인 피해자의 46.8퍼센트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는 53.2%로, 거의 비슷하다. 흉악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일 것이라는 추측을 빗나가게 하는 통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흉악범의 다수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흉악범은 곧 남자들이고 피해 대상은 여자들이란 단순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은 나약하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언론 등이 만들어낸 흉악범에 대한 이미지가 이런 잘못된 인식을 낳고 있는 셈이다.(이창무·박미랑,[3]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메디치, 2016)

충격적 사건을 접하면 즉자적으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범죄를 없애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흉악범죄 피해를 과장하면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자본주의 국가의 경찰력 개입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동안 진보 · 좌파 여성운동가들은 끔찍한 성폭력(아동 대상 성폭력 포함)이 벌어졌을 때 그 비극에 대해 누구보다 비애를 느끼면서도 대부분은 자본주의 국가의 범죄 실태 과장과 그를 빌미로 한 처벌 강화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이런 태도가 유지돼야 한다.

4. 사회운동의 과제

앞서 살펴봤듯이 ‘잠재적 범죄자 남성 vs. 잠재적 피해자 여성’의 구도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모두 틀렸다. 이번 사건을 이런 구도로 바라보며 남성 일반이 많거나 적게 범죄에 책임이 있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 일반의 본성으로 치부함으로써, 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의 제도적·구조적 요인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차별이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축적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는 점을 비껴가게 만든다. 또, 진정한 원인과 예방책을 우회하는 바람에, 흉악범죄의 진정한 사회적 요인들에 맞서 싸우기도 어려워진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끔찍한 범죄와 여성 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 참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즉, 노동자 계급과 평범한 여성들이 단결해 자본주의에 맞서고 투쟁 속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의식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1980년대 말 여전히 계급투쟁이 대안으로 여겨지던 때 여성단체들은 남녀 노동자 모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근본적 사회변혁운동을 통한 여성해방을 주장했었다. 지금,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면 안 된다는 주장을 마치 우익의 주장으로 또는 우익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역사적 무지의 소치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징계나 배제의 근거가 되는 것은 민주적 토론을 가로막는 비민주적 처사다.

한편, 경찰의 치안 강화 대책은 범죄를 없애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흉악범죄를 경찰력 강화의 명분으로 이용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 CCTV 설치 확대 같은 일들이 범죄를 없애거나 줄이는 데 별반 실효성이 없음도 인식해야 한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을 잡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정부가 마치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 양 편견을 부추기는 것에도 반대해야 한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의료 복지 지원을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또한 이번 사건과 비슷한 문제의 발생을 막을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약간이나마 감소시킬 수 있는 조처와 관련된 사항이 있다. 사건 발생 장소는 여성 전용 화장실이 아니었다. 관계법률은 2004년 이전에 지은 건물에 대해선 남녀 화장실 분리에 관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2004년 이후 지은 건물에도 일정 규모 이상이 되는 건물에만 규제를 적용한다. 이는 건물 소유주들의 이해관계와 관련 있다.

여성 차별을 없애기 전에라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한다면 표적을 남성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국가 쪽으로 돌려야 한다.


[1]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을 포함한다.

[2] 다만, OECD 평균에 비해 한국의 남성 대비 여성 피해자 비율은 높은 편인데, 이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여성 차별이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격차를 비교한 국제 보고서들을 보면, 한국의 성평등 지수 순위는 매우 낮다.

[3] 필자 이창무는 “뉴욕시립대학교 형사사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범죄·보안 전문가”다. 공저자 박미랑은 “데이트 폭력에 관한 범죄학 논문을 국내 최초로 발표했고, 청소년·여성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형사사법기관과 사회구조를 범죄학적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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