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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마오주의의 광기인가 노동자 반란인가?

경제는 둔화하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자,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기억을 떠올리는 중국 노동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1981년 덩샤오핑이 이끈 개혁파가 문혁이 “어떠한 의미로도 혁명 혹은 사회적 진보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지만, 중국 사회의 불안정이 증대할수록 문혁이 대안으로 자주 거론된다.

어떤 사람들은 문혁에 현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이 존재했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문혁은 ‘마오주의 광기가 빚어낸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공장 관리자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비판과 도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괴리 극복, 생산의 민주적 관리를 뜻한다. 과연 문혁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오늘날 문혁의 의미는 무엇인가?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초안을 작성해 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선포한 5·16 통지를 계기로 문혁이 시작됐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遠因)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실각 그리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 추진 과정에서 표출된 마오쩌둥과 그 정적들 사이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해서파관’(중국 명대사 전문가인 우한이 마오의 요청으로 쓴 역사극) 논쟁들은 그 표면일 뿐이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농업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공상적 의지주의에 기대어 대약진운동을 펼쳤지만 5천만 명의 아사라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물질적 조건이 자본축적을 지속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강제로 밀어붙일 경우 사회적 갈등이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마오쩌둥은 물질적 토대를 바꾸고 이 목적에 부합하는 상부구조를 주조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그 수단이 바로 교육과 문화였다.

마오주의의 광기?

1966년 5·16 통지의 결정에 따라 1964년 펑전을 조장으로 만들어진 ‘문혁 5인소조’가 해체됐으며, 당의 각급 조직에서 수정주의와 주자파(走資派, 문혁 때 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정파라는 의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문혁은 급속하게 정치 운동으로 변해 갔고, 첫 희생자는 중앙정치국원이었던 펑전이었다. 중앙 선전부와 문화부에 대한 전면 숙청 작업이 이어졌고, 장칭(江靑)과 천보다(陳伯達)의 지휘 아래 급진적 지식인들 중심으로 문혁 소조를 구성했다. 그리고 문혁 소조의 지시에 따라 마오주의자들이 베이징과 전국의 주요 보도기관을 장악했다.

대학에서도 문혁이 시작됐다. 베이징대학의 젊은 철학강사 네위안쯔가 학교 당국을 비판하고 혁명 지식인들에게 전투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대자보를 썼다. 학교 당국이 대자보를 제거했지만, 1주일 뒤에 마오쩌둥은 “네위안쯔의 대자보는 1960년대의 파리코뮌 선언이며, 그 중요성은 오히려 파리코뮌을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평가는 1958년 농촌 대중을 인민공사로 통합했을 때와 같은 공상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문혁으로 계급이 궁극적으로 분쇄되고 세 가지 격차(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독한 관념론이었다.

네위안쯔의 대자보를 계기로 홍위병 학생들이 권위적인 학교 당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젊은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의 문혁에서 행동대 구실을 했다.

1966년 8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1중전회에서 16조가 통과됐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내 실권파를 타도하고 네 가지 구습(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조는 문혁의 대상을 도시의 문화·교육기관, 공산당, 그리고 정부 기구로 제한해 기본적인 생산 단위로 확대되는 것을 용의주도하게 억제했다. 저우언라이는 홍위병들이 공장과 농촌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마오는 이제 문혁의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혁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을 뿐 아니라 홍위병 운동 내부 또는 홍위병과 공산당 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당내에 주자파의 전복 음모는 없었고, 류사오치(당시 국가 주석이자 마오쩌둥의 정적)도 스스로 개조하기만 한다면 그를 배제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66년 11월부터 당 중앙은 홍위병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문혁이 노동자들에게 전파됐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몰려가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조건을 성토하며 류사오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상하이에서는 부두 노동자, 철도 노동자, 운송 및 발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당 중앙은 노동자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 즉 1949년 이후 국가가 주도한 자본 축적이 낳은 결과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그러면서 주자파들의 선동이 배후라고 몰아갔다. 당 중앙은 노동자에게로 번진 문혁을 재빨리 종결하고 사태를 평정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해방군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북쪽으로는 러시아 군대와, 남쪽으로는 베트남 군대와 대치하고 있고, 미국의 군사훈련에 대비하고 있는 인민해방군을 빼내는 일은 모험이었다. 심지어 일부 반란군은 인민해방군을 공격하기도 했고, 또 일부 인민해방군은 급진적 요구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1967년 1월 마침내 반란 세력들을 통제하고 시설물을 방어하며 모든 국가 기구들을 장악하라는 지시가 인민해방군에게 내려졌다. 대중 혁명조직 대표, 당 간부, 군대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삼결합)에서 인민해방군의 비중이 높아졌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반동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계약 노동자나 견습공, 제대 군인, 농촌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들은 ‘반혁명적인’ 단체로 간주돼 금지됐다.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성무련

1966년 하반기에 노동자 반란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이 자생적으로 등장했다. 그중 성무련(후난성 무산계급 혁명파 대연합위원회)이 가장 흥미롭다. 성무련은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관료적 부르주아지와 쇠퇴하는 붉은 자본가들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봤다. 성무련은 혁명을 한 국가를 다스리는 계급들의 교체로 봤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특정 개인들의 교체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 혁명의 과제였다. “혁명의 열매들은 최종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차지한다. … 관료들의 거부로 혁명은 부르주아 개혁주의가 됐고, 문화대혁명 전의 관료적 지배가 지그재그 과정을 거치면서 또 다른 종류의 부르주아 관료 지배로 바뀌었다.”

성무련은 혁명위원회의 삼결합이 이미 패배한 관료들의 복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따라서 1949년 혁명 이후 17년을 뒤집어엎을 실질적인 혁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을 패퇴시키고 관료로부터 자유롭고 새로운 사회, 즉 중국의 인민 코민을 창조하는 것이 목표다.” 십수 년 동안 문화적 통제를 가하고 사회적 규율을 부과했음에도 레닌주의적 맹아들이 등장한 것에 당 지도부는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반란들은 더욱 폭력적이고 격렬해졌다. 우한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 장군이 ‘삼결합’을 후원하는 백만웅사 집단을 후원하고, 그에게 항의한 공안부장 셰푸즈와 선전부장 왕리가 감금됐다는 말이 돌았다. 홍위병은 베이징에 머물면서 외국인을 공격했고, 8월에는 영국 대사를 감금하는 일도 벌어졌다. 1967년 여름 마오쩌둥은 “중국에 내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장 투쟁이다” 하고 말했다.

1968년 소련 군대가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다. 이 소련 군대가 중국도 침략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69년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에서 중국과 소련 군대가 무장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당 지도부는 분열을 수습하고 국내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 화급하다고 생각했다. 1969년 4월 제9차 당대회에서는 문혁의 잔재를 깨끗이 정리하고 소련의 위협에 맞서 전국 지도부의 일부를 복권시켜 단결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문혁은 그 당시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력의 두 기둥인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경제는 대약진운동 동안에 겪었던 것과 같은 혼란을 겪지 않았다. 기껏해야 1967년에 수출이 12퍼센트 줄었을 뿐이었다. 다른 주요한 기구들도 타격을 받지 않았고, 과학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1967년 6월에 여섯 번째 수소폭탄 실험을 했고, 12월에는 일곱 번째 폭탄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배하는 중국의 기성 체제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화대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 운동이 당과 인민해방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정말 혁명으로 나아갈 뻔했다.

문혁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든 정당이든 간에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할 어떤 조직도 갖고 있지 않았다. 문혁의 경험은 무장력을 독점하고 훈련된 관료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 대항할 조직들을 노동자들이 준비해 두지 않으면 승리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날 저항에 나서는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국가 체계와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 참고문헌

찰리 호어. 《천안문으로 가는 길》, 2006. 책갈피.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004.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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