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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살지 못하는 이유

몇 년 전 베스트셀러로 명예를 누린 한 권의 책이 있었다. 피에르 쌍소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란 책이 그것인데, 각종 신문들이 느림의 철학에 찬사를 보냈고, 국내 여론도 그에 못지 않게 좋았다.
나 또한 흥미롭게 그 책을 읽었다. 우리 시대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빠름, 그 효율성에 대해 조용히, 그러나 통쾌하게 펀치를 날리는 이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면서 느린 삶을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책을 잊고 다시 몇 년을 살아 온 우리의 모습은 쌍소가 제시한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글쓰기, 포도주, 아낌”의 방법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여진 ‘왜 느리게 살지 못했는가’하는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가 다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다짐해 봐야 별반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느리게 살지 못했는가’란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일반계 중·고등학생이라면 학교와 학원에서 시험과 과제에 쫓겨 입시에 목을 매고, 대부분의 대학생 또한 시험과 과제, 자격증으로 대변되는 취업에 붙들려 있다. 직장인들은 한 푼의 돈을 벌기 위해서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 몸을 담는 다수에게 쌍소가 제시한 느림의 삶을 위한 방법은 필연적으로 영향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느림의 철학의 영향력은 ‘생존의 문제’를 벗어난 이들에게만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첫 장에 적혀 있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란 파스칼의 말은 수정돼야 한다. “대다수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사회가 순순히 고요한 방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이미 반세기 전에 버트란드 러셀이란 철학자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에서 느림(게으름)에 대해 역설한 일이 있다.
러셀은 기술 문명의 발달이 노동 구조를 개선해 많은 사람들에게 게으름을 누릴 권리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인당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한다.
노동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노동’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러셀이 지적하듯이 오직 타인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자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하게 마련이다.
러셀은 사회에 만연한 불필요한 노동에 대해서 핀 공장을 예로 든다. 그는 하루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내는 공장을 가정한다. 그 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조정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는 그런 조정을 풍속 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라는 게 러셀의 지적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나고,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기”는 현상이 벌어진다.
쌍소가 주장한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권태, 꿈꾸기 등의 ‘느림의 생활방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시간과 여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러한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느림의 삶, 사색과 여유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이 아닌 우리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