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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혐오 확산의 일등공신은 제국주의다

최근 미국 올랜도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학살 직후 오바마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적 가치” 운운하며 성소수자를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제국주의 매파인 힐러리 클린턴도 성소수자 공동체를 향해 자신이 수호자가 되겠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미국 지배자들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체로 동성애를 용인하지 않는 데 반해 서방 사회의 백인들은 우리 편’이라는 관념을 성소수자들 사이에 퍼뜨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식민지 시대의 인종차별(‘계몽된 백인과 그렇지 못한 유색인’)과 닮은 점이 많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무슬림 혐오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도 여느 인구 집단과 다르지 않다. 무슬림 중에 동성애혐오자가 적잖이 있지만 대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영국에 본부가 있는 스톤월연구소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동성애를 혐오하는 성향을 보이는가’ 하는 질문을 놓고 다양한 연구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거듭 얻은 바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 동성애혐오 성향을 가장 많이 드러낸 인구 집단은 무슬림 등 소수 인종이 아니라 바로 나이 많은 백인 남성이었다.

반면 동성애 인정이 “서구적 가치”라는 주장이 완전히 헛소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현실 사례는 아주 많다. 미국 올랜도만 보더라도 시 당국은 총격 피해자를 위한 헌혈 참가를 호소하고 있지만, 정작 올랜도의 법률은 게이와 양성애자 남성의 헌혈을 금지한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절반 이상에서 사용자가 섹슈얼리티를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합법이다. 최근 일부 주에서는 상점 주인이 성소수자 손님 받기를 거부하는 것을 합법화했다.

2009년 영국 런던 한가운데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게이 남성이 구타당하다 사망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은 1년 수업료가 2천만 원인 기숙 사립고 출신의 10대 백인 여성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동성애자 8명 가운데 1명이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영국 출입국 당국은 성소수자 난민의 성적 지향을 문제 삼거나, 심지어는 본국으로 돌아가 “조신하게” 살라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2013년 프랑스에서는 동성 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우익 50만 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동성애혐오가 비(非)서구 문화의 것이라는 발상은 전혀 진실이 아닌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올랜도 학살을 낳았다.

제국주의자들의 성 관념

동성애혐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국제 정치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중동의 동성애혐오는 (여성차별 등 다른 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 정치라는 그물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올랜도의 대량학살범이 게이클럽을 공격한 것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이는 필수적이다.

오늘날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위계적 체제이고, 각국의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은 서로 긴밀히 결합돼 있다. 이런 국가들 사이의 위계질서와 상호 경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은 미국이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잔인한 방식으로 방대한 제국을 거느렸다.

제국주의적 야욕은 늘 영토·자원·무역에 대한 장악력과 결부됐을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천대를 수반했다. 심지어 아주 오래 전 콜럼버스가 (중국과의 무역로를 찾으려다 실수로) 아메리카에 도착했던 시절에도 그랬다. 1495년 2차 아메리카 항해 기록을 보면, 한 선원은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카리브 해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는데, “[내가 탄 배의] 제독이 선물이라며 그녀를 내게 줬다.”

제국주의자들은 문화마다 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이용해서 문화의 상대적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또한 아시아(중동 포함)와 아프리카 사람들이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과 달리 영국인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봤다. 영국은 제국 확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1861년, 제국 전역에서 남성 간 항문 성교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많은 지역에 이전까지 없던 금기를 새로 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주의자들은 유럽 바깥의 세계를 관능적 공간이라고 보아 자신들의 섹스 휴양지로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고갱은 타히티 여성의 누드를 그렸고, 다른 화가들도 무슬림 가정 안에는 화려한 가구와 순종적 성노예가 가득하다고 묘사했다. 또한 19세기 영국 군대는 인도 주둔군 군인들이 아내를 인도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 12세 이상 인도 여성을 모아 집창촌을 조성했다. 군인만 여성을 제공받은 것이 아니었다. 1957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에서 고무 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인 한 영국인은 식민지 당국이 자신에게 요리와 섹스를 제공할 하녀를 선물했다고 술회했다.

같은 이유로 제국주의자들은 유럽 바깥 세계에서는 남성 간 섹스를 허용했다. 영국 소설가 E M 포스터는 1914년 이집트에서 다른 남성과 첫경험을 했고, 1960년대의 게이 극작가 조 오튼은 청소년 매춘이 가능한 모로코에서 휴가를 즐겼다.

유럽보다 동성애에 더 관대했던 중동·북아프리카

제국주의자들의 이런 관행은 당시 무슬림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들보다 게이 섹스에 더 관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게이인 사회학자 스티븐 머리와 윌 로스코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과장하지 않고, 20세기 전까지 세계에서 동성애가 가장 다채로운 모습으로 융성한 곳은 서북유럽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중동’]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반면에 1840년대 파리를 방문한 한 모로코인 학자는 프랑스의 동성애 억압에 놀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곳에서는 오직 여성들에게만 추파를 던지거나 구애할 수 있다. 소년이나 젊은 남성에게는 그럴 수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가 이처럼 놀란 것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수세기 동안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슬람 문화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조차 하지 않았다.(그런 구분은 아주 근대적인 것이다.) 모든 남성은 어린 소년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사실 여성들은 가정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 나타날 수 있었던 동성애 형태는 오직 성인 남성과 소년 간의 사랑이었다. 물론 성인 남성이 소년을 사랑하는 것은 죄로 분류됐지만, 그 남성에게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지는 않았다. ‘동성애’는 어린 소녀를 탐하거나 음주에 빠지는 것처럼 욕구를 절제하지 못해 생기는 여러 부덕 중 하나로 여겨졌다. 육체적 관계 없이 소년을 사랑하거나 그런 감정을 시로 읊는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동성애를 처벌하기 시작한 것도 아주 근대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이슬람은 죄를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예컨대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두 남성이 외설적 행위를 했다면 둘 다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들을 내버려 둬라. 알라는 언제나 회개에 귀 기울이신다. 알라는 자비로우시다.” (꾸란 4:16)

중동의 민족해방 운동과 동성애

19세기와 20세기에 중동을 포함한 제3세계에서 민족해방 운동이 등장했다. 민족해방 운동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성 노리개로 삼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파산을 보여 준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적 존엄을 요구하고, 아시아인·아프리카인은 관능적이라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반대하고, 자신들(특히 여성)을 성 노리개 삼기에 반대하는 것을 반(反)식민주의 투쟁의 일부로 여겼다.

한편, 민족해방 운동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도시 중간계급 구성원들로,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들은 대체로 남성이었고, 서방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나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의사·변호사·공무원 등 전문직에 종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조국”을 다스릴 적임자라고 여겼고 스스로 민중 다수와 다르다고 여겼다. 한 마디로 엘리트주의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면서도, 제국주의자들의 핵심 개념을 받아들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아랍은 인류 문명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려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가 찬란했음을 강조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쇠락과 함께 아랍 문명이 타락했던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전통 문화의 찬란함’과 ‘타락’이 유럽식 기준에 따라 판단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과거 동성애가 용인되던 문화를 부정하거나 또는 외부 문명 침략의 결과로 봤다. 아이러니이게도 그 근거는 바로 유럽인들이 동성애를 열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동시에, 과거 아랍 사회를 유럽식 기준에 따라 위대하게 묘사하려 했다.

△8세기 아랍의 위대한 시인 아부 누와스는 소년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를 여럿 남겼다.

그 과정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특히 곤란하게 만든 인물은 8세기 경의 위대한 아랍 시인 아부 누와스였다. 아부 누와스는 청소년과 여성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다룬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아부 누와스를 위대한 아랍 시인으로 여기기면서도 그의 일부 작품들과는 거리를 뒀다.

민족해방 운동 지도자들의 보수적 성관념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요인은 민족해방이 시기적으로 20세기 중엽에 성취됐다는 것이다. 당시는 소련이 빠른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갓 독립을 쟁취한 민족해방 운동 지도자들은 흔히 소련을 본보기로 삼았다. 스탈린주의 정치가 외견상 과거 식민 지배자들의 정치와 크게 달라 보인 것도 주요인이었다. 그 결과 제3세계 신생 독립국들에서 스탈린주의 정치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전혀 급진적이지 않았고, 동성애에 관한 입장은 아주 고약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바로 이런 과정들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19세기 유럽의 부정적 인식이 식민지 해방 투쟁과 민족해방 운동 속으로 전이됐다. 이 과정에서 동성애는 서구 문명의 오물이라는 비난을 듣게 됐다.

이슬람주의와 동성애

오늘날 일부 아랍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보수적 성관념은 대체로 서구 사회(19세기 의학 또는 1950년대 미국 정신의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형세는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이제 서방은 성적 개방성을 자신들의 우월함의 증거로 내세우며, 아랍은 성을 억압하는 등 열등하므로 서방의 개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이런 주장은 〈가디언〉 중동면 편집장이 지적한 다음 경향을 더한층 부추길 뿐이다. “중동의 문화 보호주의는 서방의 제국주의 정책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여성의 나체와 남성 동성애가 아랍의 도덕성을 침해하는 음란한 서방 문화를 상징한다고 과장되게 여겨진다.”

이런 변화는 20세기 중엽 중동에서 기대를 모으며 등장했던 아랍 민족주의가 힘을 잃고 그 자리에 이슬람주의가 대신 들어선 것과 관련이 있다. 이슬람주의의 방법론은 아랍 민족주의와 같았는데, 바로 이상적 미래 사회의 원형을 자신들의 전통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와 다른 것이 있다면,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위대한 전통으로 여긴 압바스 왕조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주의자들도 동성애를 ‘문명의 퇴보’, ‘외부 세력이 주입한 것’으로 보는 똑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비록 이슬람주의자들은 ‘서방 제국주의야말로 섹스에 환장한 야만적인 퇴폐 세력’이라는 관념을 덧붙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성적 자유 향상을 사회의 퇴보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1백 년 전 서방 제국주의 사상의 핵심을 답습하는 것이다.2

이슬람주의자들이 서구 문명의 퇴폐성을 언급하며 얼마나 성에 탐닉하는지 묘사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문헌을 찾는다면 십중팔구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 관해 쓴 것일 터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이슬람주의자들이 성적 자유를 비난하는 것은 꾸란이나 무슨 선지자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혐오에 맞선 투쟁은 반제국주의 투쟁과 함께해야 한다

오늘날 중동이나 제3세계 등지의 민중이 빈곤에 신음하는 반면 그곳 독재자들은 서방의 후원을 받거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비효율과 부패를 가리는 대신 ‘전통 문화의 수호자’를 자임하려는 독재자들에게 동성애혐오는 좋은 수단이다. 그리고 오늘날 퀴어퍼레이드 등에 참가해서 위선을 떠는 서방 정부들과 다국적기업들은 정작 그 독재자들의 동성애혐오 조장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나라에서 성소수자의 끔찍한 지위를 개선하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서방 국가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방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서방에서 성소수자 권리가 투쟁을 통해 쟁취됐듯이, 제3세계에서도 성소수자 권리 신장은 외부의 누군가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쟁취돼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주장은 현실성이 있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 주장의 현실성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1980년대 남아공에서는 흑인 노동자들이 아파르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체제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이는 등 절반쯤 혁명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남아공 사람들은 사회적 격변 속에서 기존의 사상을 모두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그 속에서 동성애자들도 수감과 사형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 결과, 아파르헤이트 폐지 이후 남아공은 헌법에 동성애자 차별 금지를 명시한 첫 번째 나라가 됐다(1996년). 남아공은 각종 법률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고용과 서비스 차별을 금지했고 동성 결혼을 인정했다(2006년). 이는 영국·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 등의 나라들보다 앞선 것이었다.

물론 이런 조처가 성소수자 차별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바로 제국주의는 동성애혐오가 번성할 환경을 조장한다는 것이고, 성해방을 이루려면 제국주의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맞선 투쟁의 일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1. Will Roscoe, Stephen O. Murray, Islamic Homosexualities: Culture, History, and Literature, NYU Press, 1997

  2. Joseph A Massad, Desiring Arabs, University of Chicago, 2007

이 글은 각각 영국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11년 5월호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2008년 3월 호에 실린 콜린 윌슨의 두 글을 기반으로 요약한 것이다.

일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정했습니다:
"영국은 제국 확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1861년 남성 간 항문 성교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금기였다." → "영국은 제국 확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1861년, 제국 전역에서 남성 간 항문 성교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많은 지역에 이전까지 없던 금기를 새로 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수정 이유) 영국 및 서양에서는 이전부터 '소도미'를 법으로 금지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