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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에 대한 다른 관측들이 놓치고 있는 점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가 세계 자본주의에 끼칠 영향은 상당하다. 당장,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이 공들인 ‘국제 질서’에 중요한 교란이 생겼다고 우려한다. 자신들의 핵심 기구의 하나인 유럽연합에서 경제력 2위(세계 5위), 군사력 1위의 영국이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노자 씨(이하 존칭 생략)가 ‘유럽연합에 잔류하든 탈퇴하든 영국이 자본주의이기는 매한가지’라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회피적이고 무기력한 반응일 뿐이다. 박노자는 우리가 ‘영국 본사’의 지시대로 말한다고 주장하는데, 미안하지만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성명 발표는 우리가 먼저 했다. 박노자 견해들의 한국 내 지지자들과 박노자의 관계는 민주적이고 우리와 영국 자매들과의 관계는 비민주적이라고 보는 박노자의 근거는 무엇인가? 좌파인 척하는 박노자를 어떻게 〈한겨레〉가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긴축 강요·민주주의 무시·난민 탄압·중동 폭격 유럽연합(EU)이 잘하는 것들. ⓒ사진 조승진

주류 언론은 브렉시트를 두고 유럽연합 탈퇴 요구가 다른 회원국으로 번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영국의 수백 년 된 고립의 전통’이라거나 ‘과거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 탓’이라는 터무니없는 논평 일색이다. 영국의 수백 년 된 전통과 대영제국 하에서 일어난 일은 청교도 혁명, 수평파와 디거스, 차티스트 노동자 투쟁, 노동대불안 등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이었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그렇다 치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민중주의 언론 〈한겨레〉가 전하는 메시지가 지독히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요약하면,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저학력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한 채 유럽 통합의 꿈을 망쳐놨다’는 것이다. 1년 넘게 진행된 논쟁 속에 투표에 참가한 영국 노동계급 다수의 선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다.

주류 언론은 정작 이번 국민투표의 쟁점이 된 유럽연합의 실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 영국·독일·프랑스 등지의 지배자들이 벌일 협상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런 분석을 따라가면 평범한 사람들은 기뻐하거나 울 수는 있어도, 향후 사태 전개에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직면한다. 이런 식의 접근은 국민투표 양 진영을 주도한 이런저런 정당들과 그들의 의도로 시야를 좁힌다.

일각에서는 유럽연합이 모종의 진보적 국제 기구라고 착각해서 브렉시트를 ‘구 시대적 민족주의’, ‘신고립주의’로 여긴다. 그러나 ‘어느 계급의 국제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외쳤을 때 그는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를 말한 것이지, IMF나 세계은행,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UN 같은 지배자들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자본가 계급은 국민국가 별로 분리돼 있어서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일 수 없다.)

유럽연합은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도구다(본지 154호 ‘유럽연합의 역사 ― 유로존과 유럽연합은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다’ 참고). 그래서 유럽연합은 IMF·세계은행과 함께 이른바 ‘트로이카’로 불리며 유럽 각국에 긴축을 강요하고, 시리아 등 중동에 미사일을 퍼붓고, 국경들에 장벽을 세우고 군함을 띄워 난민 유입을 차단한다.

원인 제공자

바로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과 우익 포퓰리즘이 온갖 형태로 기승을 부릴 조건들이 조성된다. 유럽연합은 오늘날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는 인종차별과 우익 포퓰리즘들의 해결책이기는커녕 원인 제공자인 것이다.

좌파 일각에서는 이번 투표 결과를 두고, 우익 포퓰리즘이 ‘노동자들을 포획했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번 투표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활약은 두드러졌고, 이는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제국주의 성격에 대한 노동계급의 정당한 반감이 누적·표출됐다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투표 기간에 잔류 진영에 속한 노동운동 지도자와 좌파들이, 이주민·난민을 탓하며 긴축을 자행해 온 보수당 지도자들과 무원칙하게 손잡고 ‘영국은 유럽연합 안에서 더 강력하다’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다닌 것은 몹시 나쁜 효과를 냈다. 유럽연합에 대한 정당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야말로 유럽연합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영국독립당(UKIP) 같은 우익 세력에게 떠미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독립당 같은 세력이 이를 이용했다.

그러나 유럽연합에 대한 정당한 반감이 커지는 것은 좌파가 성장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투표 결과는 약 1년 전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의 긴축안 반대(OXI) 표가 더 많이 나왔던 것과 맥락이 같은 것이고, 유럽연합에 대한 금기를 깼다는 점에서는 훨씬 더 인상적이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은 “유럽연합이 영국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것은 우리가 긴축과 난민 거부에 맞서 싸울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반겼다.

유럽에서 특히 빠르게 진행 중인 정치적 양극화가 이번 투표에 반영됐다는 것이 더 온전한 설명이다. 개혁주의자들은 ― 주류든 좌파적 형태든 ― 바로 이 양극화를 봉합하려고 무원칙하게 후퇴와 타협을 했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 과정은 투표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고, 심지어 투표 결과가 잔류였더라도 그 점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공산당(CPB) 등의 급진좌파들은 처음부터 국민투표 이후에 벌어질 정치 투쟁을 염두에 두고 탈퇴 투표 독려에 나섰던 것이다. 보수당의 탈퇴파나 영국독립당과 함께 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주장으로 그들을 반박하면서, 유럽연합에 대한 혁명적 비판과 극우 세력에 대한 비판을 결합시키는 캠페인을 벌였다.

일각에서는 영국에서 우익이 강화될 것이라고 관측하지만, 그런 미래는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다.

이런 관측의 진정한 문제는 능동적·개입주의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국민투표에서 작용한 계급적 반감이 향후 사태 전개에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인 만큼, 그런 동역학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현실을 바꾸려는 좌파의 개입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려는 한국의 지배자들에 맞서 투쟁하는 우리도 이런 능동적 개입주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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