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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개혁인가, 아래로부터의 반(反)재벌 투쟁인가?

최근 노동운동에서 재벌개혁을 주요 투쟁 의제로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6월 14일에는 민주노총과 민주노총 소속 5개 산별연맹(금속노조, 보건의료산업노조, 서비스산업노조, 플랜트건설노조, 화학섬유노조)이 ‘재벌개혁 산별연맹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재벌 개혁 투쟁을 선포했다.

또, 민주노총 지도부는 8월 22~23일 열리는 정책 대의원대회 토론자료집에서 전략 투쟁 의제의 하나로 “재벌체제 극복”을 제안했다. 이 자료집은 재벌체제 때문에 한국 경제의 저성장과 양극화(불평등 심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규정했다. 즉, “기업 부분 간 양극화는 한국 경제가 재벌대기업(대자본) 중심으로 굳어진 결과이자, 경제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우선, 경제 위기와 양극화 심화의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찾지 않고 자본의 특정 조직 형태나 소유 구조(특히 재벌)에서 찾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진단이다. 세계 각국에는 미국식, 일본식, 독일식 등의 서로 다른 기업 소유 형태가 있다. 그러나 이 경제들 모두가 위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고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재벌 개혁 요구는 비(非) 재벌 자본과의 연대라는 덫으로 노동자들을 이끌어 투쟁에 악영향을 준다. ⓒ이미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밝혔듯이, 최근의 경제 위기는 1970년대부터 분명해진 이윤율 하락 때문이다. 그리고 불평등 확대는 전 세계 지배자들이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노동계급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온 결과이다. 다시 말해, 저성장과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 때문인 것이다.

물론 이 체제의 한 부분인 한국 경제의 정점에 재벌(대기업 집단)이 있다. 재벌 총수들은 소액주주들을 등쳐먹고, 중소기업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 늘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본질은 재벌이 국가 관료들은 물론 중소기업주들과도 합심해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 한다는 것에 있다.

소유 구조 개혁?

둘째, 이처럼 재벌의 소유 구조를 주된 문제로 보는 민주노총은 “재벌 개혁 정책 실현”을 주요 방향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재벌 세습 타파, 출자총액제 강화, 지주회사 규정 강화, 계열·기업 분할 명령제 도입, 재벌 규율을 위한 ‘기업집단법’ 제정 등은 이러한 방향을 향하는 각론적 과제들이다.

민주노총의 이런 요구들은 그동안 재벌개혁론을 주장해 온 NGO들의 요구를 그대로 따 온 것이다. 그러나 재벌의 총수 경영과 ‘문어발’ 사업 확장을 저지하고 개별 회사나 기업집단의 주주를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 재벌개혁론자들은 민영화된 KT를 모범적인 기업 소유 구조의 사례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KT는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느라 노동자 수만 명을 해고했고,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실적 압박으로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지게 만들었다. 재벌개혁론을 내세운 NGO들이 펼친 소액주주 운동(주주 행동주의)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곳들도 사실상 주식시장의 큰손들과 외국계 펀드들이다.

기업 소유 구조 개혁을 추구하는 재벌개혁은 자유주의적 문제의식의 발로로, 노동자들에게는 득이 될 게 없다. 단적으로 말해, 재벌 개혁은 설사 성공하더라도 재벌 총수 일가 수백 명이 갖고 있는 권력을 금융 자산가 수만 명에게 확대하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재벌을 공격할 가장 큰 힘은 재벌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있다.

셋째, 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노동자 경영 참여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강원대 이병천 교수는 자유주의적 재벌 개혁이 결국 “재벌과 외국자본의 교묘한 동맹이었다”고 비판하고, “소액주주, 채권자, 노동자, 하청 중소기업, 소비자, 지역 사회” 등의 권익이 보장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민주화를 위해 재벌·대기업의 이사회에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도 재벌 통제 수단으로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독일식 모델이 경영 참여의 대표적인 형태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가장 수준 높은 경영 참여를 보장한다는 독일에서조차 노동자들은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결정권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독일의 경영이사회는 주주와 노조 측 추천 이사 10명씩으로 동등하게 구성된 듯 보이지만, 노조 대표 중 1명은 경영진 급이고, 주주가 선임하는 위원장은 2개의 투표권을 가진다. 독일도 정책 결정자들이 논의를 주도하는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독일 환경단체 BUND의 교통정책과장 베르너 레)

실제로 노동자 경영 참여는 독일에서 ‘하르츠 개혁’으로 노동조건이 대폭 악화되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다. 오늘날 독일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22퍼센트로 급격히 늘었다.

설사 노조가 기업 경영에 일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더라도 경영 참여는 계급 협력 정치를 강화해 노동자를 분열시킨다. 기업이 아무리 ‘투명 경영’을 하더라도 경쟁의 압력은 임금 삭감과 노동강도 강화, 정리해고를 하도록 만든다. 이때 노동자 경영 참여는 의도의 선함 여부와 관계없이 일부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을 다른 노동자들이 승인하도록 압박하는 구실을 한다.

넷째, 재벌 개혁 운동은 비(非)재벌 자본과의 연대라는 덫으로 노동자들을 이끌기 십상이다. 사실, 재벌개혁 요구는 재벌 같은 독과점이 없다면 시장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불평등을 완화할 것이라는 그릇된 전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흔히 중소기업 지원 요구와 함께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중소기업이 노동자에게 더 못되게 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최저임금 결정을 코앞에 둔 지난 6월 23일, 중소기업중앙회장 박성택은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 감소로 직결되는 만큼 기업의 지급능력을 고려해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해야 한다며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대·중소기업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대기업 근로자의 임금을 5년간 동결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대기업주들뿐 아니라 중소기업주들도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주요 과제로 제시한 최저임금 1만 원,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보장 등을 달성하려면 재벌뿐 아니라 중소기업과도 싸워야만 한다. 중소기업을 지원하자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들한테 자신의 기업주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금속노조가 올해 주요 요구로 채택한 “재벌의 원하청 초과이익공유제”도 위험하다. 물론 금속노조는 하청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재벌의 초과이익을 하청기업과 공유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실제로 금속노조는 하청기업이 받는 이익의 50퍼센트 이상을 임금 인상과 복지에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하청기업주를 지원함으로써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주장은 대기업 원청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만 낳을 우려가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 중소기업에 더 많은 이익을 분배해 준다는 것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삭감해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하청기업주와 하청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대기업주와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같다는 논리로 미끌어질 수 있다.

기업주와 정부는 이런 약점을 파고들어 원하청 노동자들을 이간질할 것이다.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 줄 수 없는 것은 원청 노동자의 임금이 높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하청 노동자들의 처지 개선을 위해 원청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줄 수 없다면서 말이다.

따라서 대안은 중소기업주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원하청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해 원하청 노동자 모두의 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다섯째, 위에서 언급된 이 모든 요인들 때문에, 민주노총이 ‘재벌 개혁’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행동을 고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속노조 김상구 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론전에서 대재벌을 이기기 힘들다. 눈앞의 임금보다 장기 전망과 방안을 세우고 조합원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현대차 노조 박유기 지부장도 한 토론회에서 임금 인상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에서] 우리 임금을 앞세웠다가는 교섭은 시작도 못 해 보고 끝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과 사측의 임금 동결 요구로 조합원들의 노동조건·생활조건이 공격받는데도 단호하게 파업을 지시하지 않고, 재벌 개혁을 내세워 국민적 호평을 얻으려는 것은 계급을 초월한 포퓰리즘(민중주의; 인민주의)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이나 중소상인, NGO(그리고 더민주당 개혁파)의 지지를 얻는 데 집중하느라 노동자들의 당면 요구들을 당당히 제출하는 것을 주저하는 초(탈)계급적 민중 운동은 재벌을 약화시키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재벌의 이윤뿐 아니라 장차 소유권까지 공격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재벌과 그 하청기업에 고용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갖고 있다. 현실에서 이것이 뜻하는 바는 임금 삭감을 위해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는 박근혜 정부와 기업주에 맞서 부문을 가리지 말고 노동자들이 투쟁과 연대에 나서도록 고무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잘 조직돼 있는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재벌의 양보를 이끌어 내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에 고무받아 자신들의 처우 개선과 투쟁에 나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