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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뇌과학: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기?

알파고가 국내에 소개된 뒤 인공지능과 그 과학적 기초가 될 뇌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쟁점 중 하나는 과연 ‘지능’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장밋빛 미래가 열려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많은 이들과 달리 스티븐 로즈는 인간의 의식을 단지 세포와 유전자들의 기계적 연결로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뇌과학에 대한 환상과 응용, 오용 문제를 다룬 이 글은 저명한 과학자인 스티븐 로즈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2010년 ‘맑시즘’ 행사에서 강연한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본지 41호(2010년 10월 2일)에 실린 것이지만 최근의 쟁점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재게재한다. 국내에 번역된 스티븐 로즈의 저서로는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공저, 한울), 《새로운 뇌 과학 : 위험성과 전망》(공저, 한울),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공저, 바다출판사)가 있다.

뇌과학(또는 신경과학)은 거대 산업이자 거대 학문이며 거대 연구 프로젝트다. 신경과학자들은 정신을 설명하고 변형·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예컨대 기억을 연구한 것으로 노벨상을 받은 에릭 캔델은 “당신의 뇌가 곧 당신이다” 하고 말했다.

이것은 엄청난 환원론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복잡한 현상들을 단지 세포나 분자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조금이라도 친한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뇌는 몸에 뿌리를 두고 있고 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뇌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신경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환원론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셈이다.

우리는 “내가 걷는다”고 말하지, “내 다리가 걷는다”고 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의 뇌가 아니라 통합적 인간 개체인 우리다.

이는 세계에 관해 신경과학이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이해에 바탕을 둔 통찰이다.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신경과학 덕분에 의료 기술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헌팅턴 병[뇌의 신경세포가 퇴화하면서 발생하는 질병]이나 알츠하이머 병을 예방하기 위한 유전자 테스트, 신경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줄기세포,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맞춤형 약, 지능이나 기억력 등을 향상시키는 약물 등이 개발될 것이라고 한다.

즉, 신경과학이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과학이 약속하는 미래에는 더 흉측한 면도 있다.

문명화된

호세 델가도[인간의 뇌에 전기 충격을 가해 정신을 조종하는 연구를 했던 생리학자]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이 세상에 꼭 들어맞는 인간으로 짜맞추어지는 “심리적으로 문명화된 사회”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다.

그런 사회에서 신경과학의 잠재적 용도는 다양하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약물, 범죄자 식별을 위한 두뇌 스캔(이른바 ‘뇌 지문 채취’라고 하는), 유전자 결정론(한 사람의 지능과 사회적 구실이 유전자로 결정된다는 생각), 전자기파를 이용한 생각 조종, 군사 신기술 등등.

이렇듯 한편에서는 새로운 과학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 통제를 가능케 할 다양한 신기술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다.

문제는 정작 신경의학적으로 가장 큰 문제인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제약업계는 이 분야 연구를 포기한 상태다. 우울증과 정신분열증 신약 중 어느 것도 30년 전에 나온 약보다 딱히 잘 드는 것이 없다.

수십 년 전에 조지 브라운과 티릴 해리스는 남부 런던의 공공 임대주택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어떤 연구를 실시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소득이 일정하지 않고 자녀가 있으며 고층 아파트에 사는 노동계급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신통한 약이라도 이런 환경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거나 나이를 먹는 것과 같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문제들이 아직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완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신경과학은 데이터가 넘쳐나지만 이론적으로는 극히 빈곤하며,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도 상당히 우려스럽다.

물론 뇌과학 덕택에 실현될 것이 유력해 보이는 기술 중에는 인간-기계 인터페이스 같은 것도 있다.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는 인체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해서 하반신 마비를 고치거나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을 말한다.

이처럼 손상된 뇌나 척추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온갖 호들갑에도 아직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경두개 자기 자극법(TMS)이라는 기술이 있다. 뇌 표면에는 미약한 자기장이 형성돼 있는데, TMS를 이용하면 이 자기장을 변형시키고 뇌 속의 자기적 작용을 조작할 수 있다. 뇌를 향해 강력한 자기파 혹은 극초단파를 쏘아 뇌의 특정 영역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말이다.

이 기술은 파킨슨 병 환자들에게도 사용됐지만 미국 군대도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미군은 뇌 영상 감시, 정신활성 화학무기, 경두개 자기 자극법 등 신기술을 이용해 병사들의 사고를 조종함으로써 전투력을 향상시키려 하고 있다.

신경 질환에 쓰는 약의 효과는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신경질환 대부분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약업계는 어째서 중산층에 견줘 서민층 가운데서 정신분열증 발병률이 갑절이나 높은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제약회사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병을 고쳐 줄 마법의 화학 공식이지, 가난이나 사회적 요인 따위가 아니다.

윤리적

또 한편으로는 각종 기억력 증진제들이 시장에 나오고 있다. 이런 약들은 윤리적·법률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예컨대 시험을 보기 전에 이런 약을 복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머리 좋아지는 약’을 온라인으로 구입하는 것과, 부모 돈으로 받는 고액 과외나 부자들에게 유리한 지역별 학력 편차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 다 윤리적인 문제이지만, 전자는 화학적이고 후자는 사회적이다.

많은 의문들에 명쾌한 해답을 줄 것 같았던 유전적 정보들은 대부분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광기’와 ‘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모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최근에는 흉악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이코패스’를 식별하는 법을 둘러싼 논의가 광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살인자들과 ‘정상인’들의 뇌 구조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해 주지 않는 사실은 연구 대상인 살인자들이 수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고, 그 사이 과연 어떤 약물을 투약받았으며 또 어떤 폭력에 노출돼 왔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일반인과 비교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접근법은 위험하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려고 굳이 토니 블레어나 조지 부시의 뇌구조를 연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올더스 헉슬리가 1930년대에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미래 사회에서는 누구나 ‘소마’라는 약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물론 우리가 소설에서와 같이 ‘소마’가 보편화된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심리적으로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온갖 향정신성 약물과 정신활성 기술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1960년대에 옥스퍼드 대학의 어느 건물 벽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고치려고 하지 말라. 잘못은 현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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