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은 실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였다. 다양한 직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었고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호텔 롯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고 이랜드 노동자들도 263일 파업 만에 일단 승리를 거뒀다.

2000년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사업장은 호텔 롯데, 한국우주항공, 칼 호텔 등 60여 개 업체였다. 이 사업장들의 비정규직 노동자 3천여 명이 투쟁을 통해 정규직을 쟁취했다(2000년 8월 28일 ‘MBC 뉴스데스크').

이 잡지가 제작되고 있는 지금, 광주의 대우 캐리어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공장 점거에 들어갔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에어컨을 만드는 핵심 시설을 점거한 상태다. 여름철에 시판할 에어컨을 이미 다 주문받아 놓은 회사측이 파업 무마를 위해 대체근로를 투입하려 하자 훌륭하게도 노동자들이 선수를 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정규직 부문은 민주노조 운동의 미답지였다. 심지어 비정규직 부문은 적지 않은 노조 활동가들에게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가 다양한 부분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작년 노동자 대회 사전 행사로 열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회에는 새롭게 얼굴을 선보인 노조들의 깃발로 가득했다. 골프 경기보조원이나 학습지 교사, 레미콘 노동자 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모두 노조를 인정받았다. 위의 투쟁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 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경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통계청 공식 통계로도 전체 고용 인구의 55퍼센트인 7백만 명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만 21.6퍼센트가 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대책은커녕 뻔뻔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고용이 경직돼”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규모를 애써 축소하려고까지 했다. 노동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비정규직 통계를 조사했던 노동경제학회는 비정규직 규모가 2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통계를 발표했다가 숫자 놀음이라는 빈축만 샀다. 그 통계에 따르면, 매년 근로 계약을 맺고 수년간 일해 온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모두 정규직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런 식의 계산법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가 비정규 노동자 비중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고용된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자그마치 회원국 평균 13퍼센트의 네 배에 이른다. 이런 현실에 대해 김영배 경총 상무의 얘기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2월 15일 MBC 100분 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와 “비정규직이 60퍼센트면 어떻고 70퍼센트면 어떻습니까?” 하는 망언을 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이윤을 늘리는 데 자신의 삶을 저당잡혀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임금의 평균 41퍼센트만을 받고, 휴일 근무 수당도 4대 보험 적용도 없으며, 더군다나 고용 불안 스트레스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호텔 롯데에서 4년 동안 촉탁 계약직으로 일한 한 남성 노동자의 말은 비정규직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임을 알려 준다. “재계약이 될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즐거워야 할 12월이 내게는 불안과 안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1년마다 인사 고과 등으로 재계약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하루살이 인생”, “파리 목숨”(민주노총의 설문조사)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임시직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최고 50퍼센트까지 떨어진다는 통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감과 관련 있다.

‘동정 어린' 시선이 내린 결론 ─ 하향 평준화

지배자들은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 뒤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단한 기득권을 누린 결과인 양 호도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을 기득권층으로 묘사하는 주장을 펴는 자들이 내놓은 대안은 역겹게도 정규직의 권리 박탈이다. 최근 “한국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싶다면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를 좀 완화시켜라.”는 내용의 OECD 권고안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경총 상무 김영배는 MBC 100분 토론회에 나와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너무 임금을 많이 받다 보니까 임금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까지 내뱉었다.

‘비정규직 규모가 26퍼센트'라는 통계를 작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신여대 박기성 교수(노동경제학회 연구팀)는 “정규직에 대한 노동법상의 보호를 완화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및 근로조건 격차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늘어날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더 나빠졌다. 민주노총의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도입 이후 절반 이상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용이 더 불안정해졌다.”고 답했다.(《비정규 노동자와 노동조합》, 민주노총 총서.)

대우차 군산 지부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된 뒤 그 다음 차례가 정규직 노동자들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지지를 보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승리의 관건

작년 승리한 비정규직 투쟁의 비결은 바로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결이었다. 호텔 롯데, 이랜드, 한국항공우주산업 노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현재 공장 점거중인 대우 캐리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승리하느냐 마느냐도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회사측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을 교묘하게 이간질시키고 분리시켰다.

안타깝게도 캐리어 정규직 노조 지도부는 어처구니없게도 경찰력 투입이 임박해 있는 이 순간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를 비난하고 있다. 다행히도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우 캐리어 정규직 노조 지도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대책위'를 만들었다. 대책위 소속 노동자들이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서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 낸다면 하청 노동자들은 승리할 수 있다.

종종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투쟁의 열쇠를 쥐고 있음은 비정규직 투쟁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 줬던 1997년 미국의 UPS 투쟁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1997년 20만 명의 노동자가 시간제 노동 문제로 2주간 회사의 문을 닫았던 UPS 파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통쾌한 순간을 맛보았다. 대부분 정규직 노동자였던 파업 노동자들은 UPS사가 정규직을 시간제로 바꾸려는 계획을 중단시켰다.

파업 노동자들은 시간제 노동자들을 위해 수천 개의 전임 일자리를 창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절반의 일자리로는 부족하다!”, “시간제로 일하는 미국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슬로건으로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UPS 노동자들의 통쾌한 승리의 비결은 바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에 있었다.

UPS 파업을 계기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선언과 행동이 이어졌다. 미국 전역에 수십 개의 도시와 주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조직이 건설됐다. 전국공정고용연대(NAFFE, National Alliance for Fair Employment)는 대표적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발해지자 새로운 노동자들이 집단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50개 첨단기술 회사의 노동자들이 미국통신노조(CWA) 산하에 워싱턴 기술노동자연맹이라는 노조를 결성했다. 심지어는 채소 배달 노동자들이 최저 임금, 시간외 급여 체불에 대해 대형 채소 상점, 약국 체인점 그리고 배달 하청업체의 기업주와 싸웠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어떤 주에서는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말 것을 명문화하는 기업윤리강령을 채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정부는 파견업체 고용 노동자들의 끈질긴 요구 때문에 기업주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는 윤리 강령을 채택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파견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법과 고용법 하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 “파견 노동자들은 상용직 노동자와 동등한 임금을 받고 단체 의료보험 혜택도 실질적으로 누려야 한다.” “실업급여에 대한 공정한 수급권을 가질 권리를 주어야 한다.”

미국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윤과 시장의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듯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운동이 더 확대되고 더 나아가 승리하기 위해서 정규직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승리의 관건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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