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단체의 개입은 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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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경찰과 대학 당국은 ‘외부 세력’ 어쩌고 하면서 현재의 운동을 ‘순수한’ 이화여대 커뮤니티만의 일로 국한시키라고 협박한다.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조직자들도 자신들의 활동이 ‘순수한’ 운동임을 표방한다.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들이 갑자기 단결과 자체적인 힘, 공동의 대의 등을 느끼게 해 주는 투쟁에 돌입하면 이런 단결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져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 정치 행동, 정치 조직 등에 의구심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런 독자적 정치단체가 마음 속으로는 운동에 진정한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네 잇속을 위해 운동을 낚아채 자기 나름의 어젠다에 꿰어맞추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더구나 기존 좌파 정당들이 집권 후 독재를 자행했거나
하지만 건강한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
온라인 커뮤니티 ‘이화이언’의 일부 회원들이 처음 본관 점거를 발의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었던가? 기자회견용 집회 등을 위한 확성기, 학교 선배들이 모금한 비용 등은 저절로 마련됐던가?
‘순수한’ 운동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만 순수운동론자들의 정치적 성격은
연대는 중요하다
‘외부
2년여 전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시민단체·노동단체
단지 분노만으로는 좀체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싸울 자신이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
물론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 있듯이 운동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용의주도한 계획·조직·리더십과 대중의 자발성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엥겔스는 군사 전략·전술의 중요한 발전은 모두 전투의 압박 속에서 분투하는 전선의 사병들이 고안해 냈다면서, 훌륭한 장교라면 사병들이 고안한 것을 취하고 전군
마르크스도 “교육자는 그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고 했다
천대받는 사람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의 행위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의식적인 소수는 다수를 대행하지 않으면서 다수를 돕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직한 리더십은 일방적이고 하향식이지 않은 쌍방향식, 대화식이다.
단결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운동이 ‘순수’하고 완전히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마르크스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이 편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그동안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되풀이됐던 것이다.
역사는 또한 순수운동론자들이 흔히 비민주적·권위주의적 조직 구조로 180도 전환하거나, 아니면 말로는 ‘자발적 운동’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독재를 자행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전자의 경우는 1960~70년대 미국의 ‘민주사회지지학생들’
혹시 현 이화여대 점거 운동 리더들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조금은 불길하다. 그들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중운위원들이 말하려 할 때 오만불손하게도 마이크를 뺏거나 전원을 꺼 버리고,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양효영을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농성장에서 퇴출시키는 행동을 했다. 특히, 양 회원은 퇴출당하기 전에 잠도 못 자게 찝쩍거림을 당하고, 화장실 가는 것과 전화 통화하는 것 등 일거일동을 감시받았다.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손가락질을 하고 집단 따돌림 등으로 괴롭히는 것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총학생회장 등 총학 집행부원들과 변혁당계 학생들이
어떤 운동이든 중립적인 정치적 공간을 형성하지 않으며, 또 자체 내의 단선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운동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참가자들은 투쟁 방법 등을 놓고 선택을,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결만큼이나 견해 차이도 자연스런 것이다. 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는 단결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결은 계속 자발적이지 않다. 단결을 의식적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단결은 결정적 물음에 부딪힌 운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각각의 물음과 대결해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운동의 단결이 보장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운동은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 단결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싸워 얻어 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