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경찰과 대학 당국은 ‘외부 세력’ 어쩌고 하면서 현재의 운동을 ‘순수한’ 이화여대 커뮤니티만의 일로 국한시키라고 협박한다.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조직자들도 자신들의 활동이 ‘순수한’ 운동임을 표방한다.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들이 갑자기 단결과 자체적인 힘, 공동의 대의 등을 느끼게 해 주는 투쟁에 돌입하면 이런 단결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져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 정치 행동, 정치 조직 등에 의구심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런 독자적 정치단체가 마음 속으로는 운동에 진정한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네 잇속을 위해 운동을 낚아채 자기 나름의 어젠다에 꿰어맞추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더구나 기존 좌파 정당들이 집권 후 독재를 자행했거나(옛 소련과 현 북한 등) 아니면 ‘개혁’의 이름으로 대중의 변화 염원을 주류 정치권에 매어놓아 변화의 잠재력을 약화시켰으므로(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이런 의심은 어느 정도는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지적했듯이,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순전히 자발적인 듯한 운동도 초보적인 리더십과 조직은 있게 마련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이화이언’의 일부 회원들이 처음 본관 점거를 발의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었던가? 기자회견용 집회 등을 위한 확성기, 학교 선배들이 모금한 비용 등은 저절로 마련됐던가?

‘순수한’ 운동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만 순수운동론자들의 정치적 성격은 (으레 그렇듯) 모호하다. 주류 언론이 (이번 경우에도) 그 나름의 목적과 의도에서 ‘순수성’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구든 자신이 순수운동론자라고 자기 기만을 하거나 남을 기만할 수 있다. 그래서 우익이든, 더민주당 지지자든, 총장 반대파 보직 교수와 연계된 사람이든, 누구든 한 목소리로 ‘운동권 배제’를 주장할 수 있다.

연대는 중요하다

‘외부(운동권)’ 세력 배제는 연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범하고 강력한 연대는 운동 참가자들이 싸워 이길 자신이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학교 당국과 정부가 반격에 부담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연대는 반격을 막아 낼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2년여 전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시민단체·노동단체(특히 민주노총) 등과 연대해 참사의 진실과 책임 규명을 위한 운동과 조직을 즉시 구축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 그저 하염없이 슬퍼하고 애도하고만 있을 것이다.

단지 분노만으로는 좀체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싸울 자신이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1885~1971)는 전략·전술의 핵심 요소가 적시성(適時性: 시기 적절함)이라고 강조했다. 투쟁을 이끌 자신이 있는 소수가 적시에, 단호하게 대중의 염원을 흡수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것”(트로츠키)이다.

물론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 있듯이 운동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용의주도한 계획·조직·리더십과 대중의 자발성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엥겔스는 군사 전략·전술의 중요한 발전은 모두 전투의 압박 속에서 분투하는 전선의 사병들이 고안해 냈다면서, 훌륭한 장교라면 사병들이 고안한 것을 취하고 전군(全軍)에 보편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도 “교육자는 그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고 했다(〈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 가운데 셋째 테제 중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의 행위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의식적인 소수는 다수를 대행하지 않으면서 다수를 돕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직한 리더십은 일방적이고 하향식이지 않은 쌍방향식, 대화식이다.

단결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운동이 ‘순수’하고 완전히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마르크스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이 편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그동안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되풀이됐던 것이다.

역사는 또한 순수운동론자들이 흔히 비민주적·권위주의적 조직 구조로 180도 전환하거나, 아니면 말로는 ‘자발적 운동’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독재를 자행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전자의 경우는 1960~70년대 미국의 ‘민주사회지지학생들’(SDS)이나 이탈리아의 ‘계속투쟁’(로타 콘티누아)이 두드러진 사례이고, 후자의 경우는 바쿠닌이 두드러진 사례다.

혹시 현 이화여대 점거 운동 리더들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조금은 불길하다. 그들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중운위원들이 말하려 할 때 오만불손하게도 마이크를 뺏거나 전원을 꺼 버리고,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양효영을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농성장에서 퇴출시키는 행동을 했다. 특히, 양 회원은 퇴출당하기 전에 잠도 못 자게 찝쩍거림을 당하고, 화장실 가는 것과 전화 통화하는 것 등 일거일동을 감시받았다.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손가락질을 하고 집단 따돌림 등으로 괴롭히는 것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총학생회장 등 총학 집행부원들과 변혁당계 학생들이 (각각 그 나름의 이유로)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양효영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학생회나 동아리연합회 등 공식적 학생단체는 평상적 시기에는 어떤 정치적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중요한 논쟁과 결정의 상황에선 단호하게 정치적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다시금 비슷한 문제로 충돌하게 되면 그 즉시 순수운동론자들과 정면대결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운동이든 중립적인 정치적 공간을 형성하지 않으며, 또 자체 내의 단선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운동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참가자들은 투쟁 방법 등을 놓고 선택을,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결만큼이나 견해 차이도 자연스런 것이다. 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는 단결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결은 계속 자발적이지 않다. 단결을 의식적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단결은 결정적 물음에 부딪힌 운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각각의 물음과 대결해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운동의 단결이 보장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운동은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 단결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싸워 얻어 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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