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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또니오 그람쉬〉, 주세페 피오리, 이매진

제대로 된 혁명가의 일대기는 영감의 원천이다. 새로 번역 출판된 《안또니오 그람쉬》(이매진, 쥬세뻬 피오리)가 바로 그런 책이다.
그람시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선 혁명가다. 그런데 그람시만큼 체계적이고 다양하게 왜곡된 혁명가도 흔치 않다.
1937년 그람시가 죽고 나자, 그가 창시한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를 스탈린주의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는 다시 개량주의자로 왜곡했다. 더 광범하게는 마르크스주의를 혁명과 무관한 학술적 탐구분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수난당했는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쥬세뻬 피오리의 전기는 이런 잡다한 왜곡으로부터 혁명가 그람시의 진면목을 되살려 놓았다.
역설이게도, 그람시 왜곡이 기승을 부린 것은 혁명운동에 남긴 그의 위대한 기여 때문이다. 그는 혁명적 신문 〈신질서〉를 창간하여, 이탈리아 사상 최대의 공장점거파업을 지도했다. 1921년에는 사회당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했다.
또, 1926년에는 그의 가장 성숙된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리용테제’를 통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이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서 차지한 그람시의 비중 때문에 무솔리니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의 “두뇌활동을 중단시키기”위해 그를 가두어야 했다.
파시스트의 감옥에서 그람시가 죽자,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의 저작을 왜곡해 친스탈린주의 캠페인에 도용했다. 그러나 투옥되기 전에 그람시는 좌익반대파에 대한 스탈린의 관료적 조치에 반대했다. 또한 톨리아티가 수행하고 있던 스탈린의 초좌익적 3기 정책에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무엇보다 그람시는 스탈린주의와는 정반대로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을 통해 무솔리니를 패퇴시킬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초좌익 분파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방 공산당이 전면적으로 우경화했을 때,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람시를 개량주의자로 변모시켰다. 모스크바로부터의 ‘자립’에 그람시의 스탈린 비판이 유용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람시의 혁명적 국가관을 왜곡해 공산당이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결국 그람시의 사상은 이탈리아 공산당과 기민당의 ‘역사적 타협’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이 시기에 영국공산당 내 우파 지식인들은 소득정책을 정당화 하는 데 그람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지지자 황태연이 그람시의 ‘남부문제’ 문헌을 들어 지역연합을 주창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옥중수고》를 집필했다. 그러나 그람시는 파시즘 정부의 탄압과 정보의 제약 때문에 매우 자기 검열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투옥 전 그람시의 저술과 실천 활동에서 분리하여 《옥중수고》의 일부 개념을 편의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그람시의 일부 모호한 서술에 대한 논평은 크리스 하먼의《곡해되지 않은 그람시》를 보라.)
쥬세뻬 피오리의 《안또니오 그람쉬》에는 1916년 혁명 운동에 전념하면서부터 1926년 투옥되기 전까지 혁명가 그람시의 헌신적인 활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학생 그람시가 남부 농민반란을 겪으며 정치화하는 과정, 치열한 탐구와 지칠 줄 모르는 토론, 토리노 공장점거파업 개입활동 등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개량주의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과 함께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위한 그람시의 노력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전·반자본주의 운동 물결 속에 놓인 오늘날 사회변혁운동에서도 그람시의 사상과 실천은 여전히 빛난다. 그의 논쟁과 실천, 사상의 발전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갖가지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람시의 초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싶은 활동가라면 일독을 권한다.